#. "점수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만, 끝났으니 열받지 말고 후련하게 자유를 즐기자"
현장의 심상찮은 분위기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2연패가 쉽지 않으리란 것을 직감했다. 자신과의 싸움, 마지막 무대라는 의미에만 집중했다. 후회없는 클린 연기, 아름다운 무대였다.
#. "올림픽이라는 큰 대회이다 보니 이번에 더 그런 것 같은데, 나는 아무 미련이 없다."
김연아의 은메달에 국내외 여론은 발칵 뒤집혔다. 피겨팬들이 ISU에 재심을 요구한 서명운동은 5시간만에 100만명을 돌파했다. 정작 본인은 덤덤했다.
21일 새벽(한국시각) 프리스케이팅 무대에 나선 김연아는 이미 심판, 점수, 메달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 어느 때보다 '프리'하게 날아올라, 자신의 모든 것을 미련없이 펼쳐보였다.
프리스케이팅 마지막 순서인 김연아 바로 앞에 나선 러시아 신예 소트니코바는 엄청난 고득점을 기록했다. 149.95점이었다. 지난 1월 유럽피겨선수권대회에서 세운 퍼스널 베스트 131.63점을 무려 18.32점이나 경신한, 불가해한 점수였다. 러시아 홈 관중들이 뜨겁게 열광했다.
150점 이상을 받아야만 역전이 가능한 상황, '디펜딩챔피언' 김연아는 흔들림이 없었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더 강해지고, 불리한 상황에서 더 독해지는 '강심장'은 시종일관 똑같았다. 결과를 예감했지만, 주눅들지 않았다.피겨인생의 마지막을 수놓은 프로그램 '아디오스 노니노'에 맞춰 자신이 걸어온 길을 오롯이 펼쳐보였다. 17년 7개월을 함께한 스케이트와의 이별을 마지막 탱고 선율에 실었다. 아련한 눈빛, 단아한 손짓, 깔끔한 점프를 이어갔다. 12가지 과제를 모두 충실히 이행한 '클린'이었다. 얼음위 유려한 흐름에는 한치의 끊김도 주저함도 없었다. 똑딱똑딱 미션을 수행하기 바쁜 10대 에이스와는 클래스가 달랐다.
'김연아의 흠결없는 연기는 러시아 아레나의 얼음에 흠집 하나 내지 않았다(Yuna Kim's flawless performance cuts no ice in a Russian arena).' 미국 LA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빌 플라시케의 평가대로다. 롱엣지도, 엉덩방아도, 무리한 동작도 없었다. 점프 전후의 표정과 자세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천의무봉'의 연기로, 빙판에서 자유롭게 날아올랐다. 전세계 팬들 앞에서 '퀸연아'의 품격을 증명해 보였다.
은메달 후 김연아는 남몰래 무대 뒤에서 눈물을 쏟았을 뿐 공식석상에선 의연했다. 기품 있고 당당했다. 판정에 대해서도 쿨하게 대처했다. 억울하다든지 속상하다든지 하는 흔한 표현조차 하지 않았다.돌이켜보건대, 그녀가 "억울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쇼트프로그램 직후, 딱 한번뿐이다. "연습때 늘 클린을 했는데, 오늘 클린을 하지 못한다면 억울할 것같았다." 김연아에게 '억울하다'란 자신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나 쓰는 말이다.
타인의 평가에 신경쓰지 않았다. 한점 부끄럼 없이 최선을 다했고, 체력적, 심리적 한계를 뛰어넘은 스스로에게 100점 만점에 120점을 부여했다. 그걸로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