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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복싱 한순철 은메달, 세계랭킹 19위의 반란

노주환 기자

기사입력 2012-08-12 22:09


세계랭킹 19위. 모두가 세계랭킹 1위 후배 국가대표 신종훈(23·라이트플라이급)의 금메달을 기대했다. 28세로 대표팀 막차인 한순철(28·서울시청)은 혼자 섭섭함을 곱씹었다.

이번이 마지막 올림픽 도전이라고 맘먹었다. 10년 가까이 태극마크를 달았다. 4년전 처음 나간 베이징올림픽에선 어이없이 1회전에서 탈락했다. 당시 밴텀급(56㎏)에 출전했는데 경기 직전 체중 감량에 실패했다. 은퇴하고 싶었다.

아빠 복서의 절실함이 통했다

2010년 한순철 인생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는 2009년 후배 소개로 6살 어린 지금의 아내(임연아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당시 아내는 고등학교 졸업반. 2010년 4월, 둘 사이에 첫 아이가 생겼다. 그 아이가 이제 두살이 된 첫 딸 도이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다. 부양 가족이 둘이 됐다.

한순철은 체급을 올려 나간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선 동메달에 그쳤다. 지독한 대표팀에 훈련에 신물이 났다. 오른팔 관절이 자꾸 말썽을 부렸다. 지난 2월 한창 올림픽을 준비하다 급성간염까지 걸렸다. 두달의 금쪽 같은 시간을 그냥 보냈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그럴 때마다 이승배 국가대표팀 감독은 한순철에게 "마누라와 딸을 생각해라"라고 했다.

그는 메달을 간절히 기원했다. 미뤄왔던 군입대를 할 경우 대학생인 아내는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또 딸의 육아도 아내가 혼자서 책임져야 했다. 한순철은 8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가이브나자로프를 꺽고 동메달을 확보, 병역 특례를 받게 돼 군문제를 해결했다. 큰산을 넘자 4강전에선 리투아니아의 페트라우스카스를 꺾고 대망의 결승전까지 올랐다.

그리고 아빠 복서는 12일(한국시각) 런던올림픽 남자 복싱 라이트급(60㎏) 결승전에서 올림픽 2연패를 노리던 우승 후보 로마첸코(우크라이나)에 9대19로 판정패했다.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 값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복싱도 된다는 걸 보여줬다


복싱은 한때 메달 효자 종목이었다. 이번 한순철의 은메달을 포함해 역대 올림픽에서 복싱은 금메달 3개, 은메달 7개, 동메달 10개를 땄다.

한국 복싱이 최고로 강했던 1980년대에 금 3개를 땄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신준섭(미들급),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김광선(플라이급) 박시헌(미들급)이 우승했다.

복싱은 한국 정부 수립 이후 첫 출전했던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역도(김성집)와 함께 동메달을 안겼다. 한수안(작고)이 플라이급 3·4위 결정전에서 마들로치(체코슬로바키아)를 꺾고 3위를 차지했다. 이후 한국은 84년 LA올림픽에서 신준섭의 복싱 첫 금이 나올때까지 끊임없이 도전했다. 56년 멜버른올림픽에서 송순천, 64년 도쿄대회에서 정신조가 결승전에서 져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복싱은 금 2개로 한국이 종합 4위를 차지하는데 큰 몫을 했다.

이후 한국 복싱의 국제 경쟁력은 내리막을 탔다.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동메달 2개, 96년 애틀랜타대회에선 은메달 1개를 땄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은 노메달로 최악이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선 동메달 2개, 4년 베이징올림픽에서도 동메달 1개로 금메달에 도전해보지도 못했다.

한순철의 이번 올림픽 은메달은 복싱도 충분히 다시 세계 정상권으로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더이상 복싱은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하면 될 수 있다'는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척박한 현실, 은메달을 따도 갈 자리가 마땅치 않다

하지만 국내 복싱의 현실은 척박하다. 이번 은메달은 가뭄에 내린 한줄기 단비와 같다. 여전히 미래는 여전히 어둡다.

복싱 인기는 1970~80년대가 절정이었다. 그후 야구, 축구, 농구 등이 차례로 프로스포츠로 변모하면서 인기를 가져갔다. 그러면서 복싱은 자연스럽게 하락세를 탔다.

우수한 자원이 사각의 링을 멀리하게 됐다. 1980년대 가장 선수층이 두꺼웠던 라이트플라이급(54㎏)의 경우 전국 중등대회에 70~80명이 출전했다. 30년이 흐른 요즘은 가장 선수가 많은 라이트웰트급(64㎏)에도 출전 선수가 절반으로 확 줄었다. 30명 정도가 붙어 국내 우승 메달을 가져간다. 국가대표 신종훈(인천시청)을 경북체고 시절 지도했던 곽귀근 울릉중 교사는 "복싱을 그만두면 진로가 불투명하다. 또 복싱을 하더라도 4년대 대학 졸업장을 따기도 힘든 상황이다"라며 "이러다보니 큰 선수로 키워볼만한 유망주가 보여도 그 부모를 설득시킬 수 없어 포기할 때가 많다"고 했다.

복싱도 비인기 종목의 비애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라고 해서 선수 은퇴 이후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한순철은 선수 은퇴 이후 복싱 체육관을 차릴 계획이라고 한다.

예전엔 경희대 동국대 같은 유명 4년제 대학에서 복싱 특기자를 뽑았다. 요즘은 한국체대 용인대 등 복싱부가 있는 4년제 대학이 몇 군데 밖에 안된다.

우리 사회는 경제 수준이 높아졌다. 한마디로 먹고 살만해졌다. 대다수 부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식에게 복싱을 권하지 않는다. 취미로는 괜찮지만 직업으로 복싱을 하겠다고 했을 때 쌍수를 들고 환영할 부모는 많지 않다. 복싱을 생활체육으로 즐기는 인구는 제법 된다. 복싱의 다이어트 효과를 보려는 것이다. 세계를 제패할 엘리트 복서를 키워내는 건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노주환 기자 nogoo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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