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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육상]'꼴찌에서 한국新까지' 박칠성이 쓴 인간승리 드라마

이건 기자

기사입력 2011-09-04 14:34 | 최종수정 2011-09-04 14:34


한국 남자 경보 50km의 간판 박칠성이 파이팅을 외치며 경기를 펼치고 있다. 대구=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

"아빠는 왜 꼴찌만 해요."

박칠성(29·상무)는 잠에서 깼다. 또 악몽이었다. 땀이 흘렀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만큼 부담이 컸다.

박칠성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꼴찌'다. 7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 20㎞ 경보였다. 중장거리를 뛰다가 경보로 전향한지 5년만에 올림픽 무대에 나섰다. 신일영 이대로 등과 함께였다. 첫 무대였다. 경험을 쌓기 위한 출전이었다. 치열한 사투끝에 1시간32분41로 골인했다. 그런데 순위가 문제였다. 41위였다. 총 48명의 참가선숙 가운데 7명이 완주하지 못했다. 완주한 선수 중 꼴찌였다.

꼴찌는 가슴 속에 남았다. 훈련을 하다가 지칠 때 '꼴찌'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다시는 꼴찌를 하고 싶지 않았다. 가장 무서운 것은 2008년 태어난 아들 순남(3)과 딸 유라(2)에게 또 다시 꼴찌를 하는 모습이었다. 이제 경보가 무엇인지 알기 시작한 자식들에게 일등은 아니더라도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었다.

훈련 밖에 없었다. 박칠성은 경보에 유리한 체형이 아니다. 1m74의 적당한 체구지만 다리가 짧다. 마른 체형도 아니다. 통뼈에 근육도 많다. 스피드를 내기에는 부적합하다. 지구력으로 버텨왔지만 이제 세계 경보는 스피드싸움으로 전개되고 있다. 허점 투성이인 박칠성이 가진 것은 끈기와 악이었다. 힘들어도 걷고 또 걸었다. 팀훈련이 끝나도 2~3시간씩 개인훈련을 했다.

성실함이 주위를 매료시켰다. 이민호 코치를 비롯해 경보계는 박칠성을 적극 도왔다. 2009년 상무 입대가 대표적이다. 상무는 당초 경보 선수를 뽑을 계획이 없었다. 박칠성은 일반병으로 복무해야하는 처지였다. 이 코치가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소속팀인 삼성전자 육상단도 힘을 썼다. 상무와 국방부에 가서 읍소했다.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톱텐안에 들 수 있는 재목이라고 설득했다. 일반병 입대 3일전에 상무에서 박칠성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덕분에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노력과 주위의 도움 덕에 박칠성은 새로운 역사를 썼다. 3일 열린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남자 50㎞ 경보에서 3시간47분13초의 한국신기록으로 7위를 기록했다. 50㎞를 병행한지 5경기만에 거둔 쾌거였다. 박칠성의 눈은 이제 2012년 런던올림픽을 향해 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꼴찌, 2008년 베이징올림픽 33위를 설욕할 기회다. 박칠성은 경기가 끝난 뒤 "페이스를 더욱 끌어올려서 내년에는 메달권까지 노려보겠다"고 했다. 어느새 달려온 아들 순남을 안고 인터뷰에 나선 박칠성은 "세 바퀴(6㎞) 정도를 남겨 두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내와 아이가 지켜 보고 있어 완주했다"고 공을 가족들에게 돌렸다.
대구=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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