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28)
기사입력 2000년 04월 04일 14시 25분
그로부터 10분쯤이 지났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대진이 방문을 열자 고윤희가 노인 둘과 함께 들어섰다.
방안의 노인들 사이에서 낮은 탄성이 일었고 두 노인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호텔까지 모두 모인 것 만으로도 그 둘은 감격한 것이다.
그래도 20분쯤 먼저 왔다고 세 노인은 냉장고를 열고 마실 것을 꺼내어 두 노인에게 권했고 화장실의 냉온수 조절법도 설명해 준다.
창가에 선 이대진이 눈짓을 하자 고윤희가 다가와 섰다. 이대진이 정색했다.
"장용수를 어떻게 했소?"
"처치 했어요."
죽였다는 말이었다. 입맛을 다신 이대진이 탁자 위에 놓인 돈가방을 바라보았다. 돈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당신이 날더러 먼저 호텔로 들어가라고 말했을 때 짐작은 했습니다."
잘 훈련된 고윤희가 장용수 듣는데서 그런 말을 할리가 없는 것이다. 이대진이 찌푸린 얼굴로 고윤희를 보았다.
"오늘밤에 당장 공안당국에 비상이 걸릴텐데. 세 사람이 여관방에서 피살 되었으니 말이요."
"북한 수색조가 추적받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요?"
"방에다 북한 수색조의 자취를 조금 남겨두었습니다."
"그 총도 북한제지요. 방에다 버렸습니다."
그러자 이대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그자들을 처치할 계획이었군."
"쓰레기를 치운 것 뿐입니다."
싸늘하게 대답한 고윤희가 힐끗 노인들을 보았다. 긴장이 풀린 듯 노인들은 제각기 TV를 보거나 음료수 병을 들고 있었다.
"그런 쓰레기도 있지만 나는 저 노인들을 고향에 보내는 것에다 목숨을 걸었습니다. 나같은 조선족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세요."
머리를 끄덕인 이대진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노인들을 재웁시다."
노인들의 방은 2개였는데 하나는 2인실을 3인실로 만든 것이다. 그들이 노인들을 방에 모시고 가서는 전화 사용법까지 일러주고 돌아왔을 때는 밤 12시가 넘어 있었다.
"자, 그럼 나는 지금부터 김수용인가?"
털썩 침대 끝에 앉은 이대진이 고윤희를 바라보며 웃었다.
"당신은 정미선이고."
그리고 둘이는 부부인 것이다. 내일 아침에 여행사 안내원한테부터 그렇게 보여져야 할 것이고 다섯 노인들과는 모르는 사이로 만나야 한다.
고윤희가 화장실의 문 손잡이를 잡고는 머리만을 돌려 이대진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서로 떨어져 자는 것이 더 어색하겠지요?"
"난 괜찮지만 당신이 불편하다면 내가 바닥에서 자지요."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차갑게 말한 고윤희가 눈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방에는 더블베드 하나 뿐이다.
"같이 자요. 그런걸로 신경쓰고 싶지 않아요."
고윤희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침대에 그대로 팔베개를 하고 누운 이대진은 천정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윤희에게 압도당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상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인데 이쪽만 어떻게 자야하나 하고 아까부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화장실 안에서 샤워기의 물 뿜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맨살이 철벅이며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손바닥으로 어딘가를 치며 씻는 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이대진은 저 여자는 교양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까지 여자와 수없이 잠자리를 가졌지만 화장실에서 나는 저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