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23)
기사입력 2000년 03월 29일 14시 50분
부대사 최학진이 김경희의 전화를 받은 것은 오전 10시경이었다. 김경희는 자신을 북한의 해외사업단 소속 중국 주재 부단장이라고 소개했으므로 최학진은 긴장했다.
그로서는 중국주재 간부와 통화를 했다는 것 만으로도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신중한 성격의 최학진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부단장이시라면 베이징주재 북한 대사관에다 확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잘 아시다시피 남북간의 교류가 없다보니까 오해를 피하고 싶습니다만."
"그렇다면 지금 확인을 해보시지요. 북조선 대사관의 전화번호는 잘 아실테니까."
선뜻 대답한 김경희가 덧붙였다.
"그쪽 부대사한테 직접 해보세요. 교환이 바꿔줄 것입니다."
가슴이 내려앉은 최학진은 대사에게 보고부터 할까 하다가 우선 확인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미 이 전화는 장난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북한 대사관과는 금방 연결이 되었고 부대사 홍진열도 자리에 있었다.
"남조선 부대사시라구요?"
최학진이 자신을 소개하자 홍진열이 정중히 되물었다. 그와는 아직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이렇게나마 인사를 나누게 되는군요."
"확인할 일이 있어서 전화를 했습니다. 베이징주재 북한의 해외사업단 부단장에 김경희란 분이 계십니까? 제가 조금 전에 전화를 받았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그럼 인사는 나누었으니 김경희 동무를 바꿔 드릴까요?"
놀란 최학진이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다이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김경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확인은 하셨을테니까 용건을 말하겠습니다. 극동전자의 이대진이 지금 탈북자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남조선 당국이 아직도 그자를 소환시키지 못하는 것은 방조 내지는 협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아니, 우리는."
"우리는 그 증거를 갖고 있단 말입니다. 이대진은 남조선 기관원이 분명한 여자와 함께 탈북자 5명의 한국 여권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인으로 가장시켜 데려갈 계획이지요."
"이, 이것보시오. 우리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여권발급은 우리 소관이지만 우리는 전혀."
"경고합니다. 만일 탈북자가 한국으로 넘어간다면 북남 관계에 엄청난 결과가 올것입니다. 당신들은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최학진은 하얗게 굳어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대사 집무실로 들어선 것은 잠시 후였다. 그리고는 더 굳어진 얼굴로 집무실을 나왔다.
그의 방으로 노정수와 박장호가 불려 갔을 때 그는 막 서울의 외교부와 통화를 마친 후였다. 그가 앞쪽에 앉은 박장호부터 쏘아보았다.
"박장호씨, 국정원에서 탈북자 5명의 여권을 만들어 주었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눈을 치켜뜬 박장호가 최학진을 마주 보았다.
"여권을 만들어 주다니요? 여권발급은 외교부 소관이 아닙니까?"
"북한쪽에서 전화를 해왔소. 그자들은 이대진이하고 기관원인 여자가 탈북자 5명의 여권을 만들어 주었다는 증거를 갖고 있다는 거요."
"그새끼들 거짓말을 믿습니까?"
박장호의 목소리가 차츰 높아졌다.
"탈북자들을 못찾으니까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증거는 무슨 개뼉다귀같은 증거란 말입니까? 우리가 그새끼들 거짓말을 어디 하루 이틀 겪어봅니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