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카사노바] 가짜 재미교포 사업가 (5)
기사입력 2000년 03월 02일 14시 55분
서울 변두리의 한 미술학원에 점잖은 중년신사가 들어섰다.
이 학원에서는 학원생들의 작품을 모아 전시회를 열고 있는 중이었다. 조그만 학원에 의자를 치우고 벽에 작품 30여점을 옹기종기 걸어 놓았는데 학원생들의 친구인 학생들만 간간이 찾을뿐 비교적 한산했다.
한켠에서 학생들의 작품을 뒤척이고 있던 학원강사 김숙경(여·43．가명)은 중년신사가 들어오자 학부형인가 싶어 밝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중년신사는 김숙경의 시선을 뒤로 한채 묵묵히 학생들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먼저 학원장에게 다가와 인사부터 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학부형은 아닌 것 같았다.
김숙경은 이런 변두리 학원에 학부모도 아닌 중년신사가 들어왔다는게 의아스러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학생들의 작품앞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서 보다가 가까이 다가서 보기도 하며 감상하는 것이었다.
김숙경의 눈엔 그처럼 관심을 갖고 봐주는 그가 한없이 고맙고 중후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던 그가 슬며시 돌아서더니 김숙경쪽으로 다가와 "원장 선생님이신가요？"하고 물었다.
김숙경이 "아니에요. 강사예요"하고 대답하자 "학생들의 작품이 정말 훌륭합니다"하고는 작품 한점을 가리키며 "디비저니즘이군요. 쇠라의 작품을 연상시킬 정도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그 옆의 작품을 가리키며 "여학생 작품인가요？"했다.
"네."
"비제 르브렁의 작품처럼 남성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여성스럽고 섬세한 감성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요."
김숙경은 놀라웠다. 변두리 미술학원생 작품전에 이처럼 높은 식견을 가진 사람이 찾아올 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자들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니 한마디로 붕붕 뜨는 느낌이었다.
"작가 선생임이신가요？"
"아, 아닙니다."
"그럼, 평론가？"
"아닙니다. 그저 미술품을 좋아할 뿐이죠."
김숙경은 차를 한잔 대접하며 "저는 김숙경이라고 합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러자 중년신사는 명함을 한장 꺼내 건네주며 "미국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나 하는데 잠시 다니러 왔다가 지나가는 길에 전시회 팜플렛이 붙어있기에 들어와 본 겁니다"했다.
김숙경이 명함을 들여다보니 모두 영문으로 돼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케이터링 회장 강성수'라고 나와 있었다.
세상에. 여사장 박선희를 농락하고 거액을 뜯어내더니 이번엔 미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으로 둔갑, `공자앞에서 문자'를 쓰며 유혹의 덫을 놓고 있는 것이다.
강성수는 박선희를 만나 공갈협박을 하며 농락하고 있으나 더이상 돈을 뜯어내기가 어렵자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러 다니던중 김숙경은 1년전 사업을 하는 남편과 이혼하면서 위자료를 5억원이나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접근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김숙경은 "어머, 사업하시는 분이 어떻게 미술에 조예가 그리도 깊으세요？"라며 몹시 의아해했다.
강성수는 순진한 김숙경 앞에서 의젓한 말투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나도 과거에 미술 공부를 한적이 있지요. 미국에서 처음엔 친구들과 미술대학에 들어갔는데 소질이 부족해 포기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로 다시 입학해 경영학을 공부했지요. 그래서 사업을 하게 된 겁니다."
강성수는 얘기하면서 슬며시 김숙경의 눈치를 살폈다. 은근히 관심을 갖는 표정이 엿보이자 한발 더 나갔다.
"그때 미술대학에 함께 들어간 친구들은 이제 중진작가로 성장, 국제미술전 심사위원을 맡고 있지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