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카사노바] 가짜 재미교포 사업가 (1)
기사입력 2000년 02월 27일 14시 32분
"박부장은 거래처 수금 좀 체크하고 안부장은 K실업 계약건을 오늘 중 매듭지으세요."
(주)J산업 사장실. 이른 아침 출근한 박선희 사장(여．47)은 서둘러 결재서류를 챙기고 간부사원들을 불러 업무지시를 했다.
부산 출장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두른 것이다. 대충 업무지시가 끝나자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와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향했다.
항공편으로 가면 빠르지만 사업에 쫓기느라 여행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기에 시골의 정취를 보면서 편안한 여행을 하기 위해 기차를 택했다.
몹쓸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의 사업체를 물려받아 운영한지 어느덧 10년. 여자의 몸으로 기업을 이끌어가는게 힘들기 그지 없었지만 그동안 사세가 신장해 영남지역에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부산 사상공단과 창원공단에 매물로 나와 있다는 부지도 둘러보고 그 지역 하청공장도 물색하기 위해 1박2일 출장을 떠나는 것이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평일이어서 바로 출발하는 새마을호 열차를 탈 수 있었다. 원했던대로 창쪽 자리여서 몸을 푹신한 좌석에 묻고 앉았다. 뒤이어 옆자리 손님이 찾아와 앉았다. 힐끔 보니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젊잖은 신사였다.
곧 열차가 출발했고 박사장은 눈을 지그시 감은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파트 숲과 공장지대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녹색 들판이 펼쳐졌다. 녹음이 짙은 산과 군데군데 화사하게 피어있는 꽃들, 싱그럽게 무르익은 봄냄새가 그윽히 풍겨져 열차안으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동안 사업에 찌들고 지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볍고 맑아지는 것 같았다. 문득 어린 시절 고향의 들판에서 뛰어놀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시절의 추억을 더듬고 있는데 옆자리 신사가 입을 열었다.
"오! 뷰리풀! 고국의 경치는 정말 멋져."
`교포인가?' 박사장의 감겼던 눈이 잠시 벌어졌다.
옆자리 신사의 감탄사는 또 나왔다.
"저 속에서 뛰어놀던 어린 시절이 정말 그립구먼"하면서 박사장에게 말을 걸어왔다.
"실례지만 여사님께서도 혹시 저런 곳에서 뛰어놀던 어린시절이 있으셨습니까?"
박사장은 마치 생각을 들킨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옆자리 신사에게 고개를 돌려 "네"하고는 "외국에 계신 모양이죠?"하고 물었다.
"네, 국민학교(초등학교)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요. 고국에 잠시 다니러 온 겁니다."
"고향이 시골이셨나봐요."
"네, 조치원입니다. 여사님은요?"
"전, 옥천이에요."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겠죠?"
"아파트가 들어서고 빌딩도 지어지고 옛날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돼 있을거예요."
이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술술 풀려나갔다.
"그런데 여사님께서는 어디까지 가시나요? 저는 부산까지 가는데."
"어머, 저도 부산까지 가는데."
"저는 여행삼아 가는데 여사님께서는 무슨 볼일로?"
"조그만 사업을 하는데 사업관계로 가는 길이에요."
"혼자 여행하느라 적적하던 차에 말벗을 만나 정말 반갑습니다."
열차가 달릴수록 이들의 대화는 무르익었다. 대화는 "제가 어렸을때 부산의 영도다리가 하루에 두번씩 끄떡거린다고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도 그런가요?" 등 옆자리 신사의 궁금증 위주로 이어져 나갔다. 박사장은 몇십년만에 고국을 찾았다는 재미교포 신사에게 자상하게 설명해주느라 시간가는줄 몰랐다.
어느덧 부산에 도착하자 옆자리 신사는 "덕분에 즐거운 여행이 됐습니다. 시간이 되신다면 오늘 저녁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은데"하면서 명함을 건네줬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