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투쟁 (15)
기사입력 2000년 02월 11일 14시 41분
백경일은 술잔을 한모금에 비우고는 더운 숨을 뱉었다. 옆에 앉은 문영애가 빈잔에 술을 채우면서 힐끗 백경일의 눈치를 보았다.
저녁 8시 반이었다. 회사에서 곧장 문영애의 아파트로 퇴근해온 그는 저녁도 먹지않고 술만 마시는 중이다.
"무슨 일 있어요?"
견디다 못한 문영애가 마침내 그렇게 물었지만 백경일은 눈만 흘겼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데다 뒤끝이 긴 성격인지를 아는 문영애이다. 잠자코 안주로 내놓을 과일을 깎는데 백경일이 불쑥 말했다.
"회사 과장 한놈이 날 엿먹이고 있어."
문영애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백경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회사돈을 횡령한 증거를 찾았는데 그놈은 국정원까지 동원해서 그것을 엎어버렸다. 나하고 사장님만 병신이 되었어."
"어머나 세상에."
누구한테 당했다는 소리는 이제까지 한번도 백경일로부터 들어본 적이 없는 문영애이다. 놀라 입을 쩍 벌린 문영애를 보자 백경일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암 덩어리같은 놈이다. 그놈을 긁어내야 내가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
"아무리 국정원이라두 그렇지. 왜 그냥둬요?"
문영애가 분개한 얼굴로 백경일을 바라보았다.
"증거까지 있다면서요? 국정원이 그것을 어떻게 덮었는데요?"
"그놈들도 한통속이야. 내가 다 알아."
더이상 말하기 귀찮다는 듯이 백경일은 다시 술잔을 들어 술을 삼켰다. 속에 뭉쳐있던 응어리가 터져나온 때문인지 백경일은 평소보다 과음을 했다. 보통 10시면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는데 오늘은 11시가 되도록 뭉그적거리면서 갈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문영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주무시고 가실 거예요?"
"은행 사람들하고 술 마신다고 했으니까 늦어도 돼."
"그럼 벗고 씻으세요. 더운물에 들어가 계시면 기분이 나아지실 거예요."
"이봐, 술먹고 목욕하다가 심장마비로 가는 수가 있어"했지만, 백경일은 문영애가 벗기는대로 몸을 맡겼다. 술기운이 퍼진 때문인지 얼굴 표정은 조금 느긋하게 풀려 있었다.
벌거벗은 몸을 탕 안에 담그자 백경일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느새 팬티 하나만을 걸친 문영애가 들어와 더운물을 백경일의 어깨 위로 적셨다.
"너도 들어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영애가 팬티를 벗어 던지더니 탕 안으로 들어와 마주보며 앉았다. 대형 욕조 안이어서 둘이 들어가 있어도 넉넉했다. 백경일이 손을 뻗어 문영애의 허벅지를 쓸었다.
"너, 행동 조심해야 돼. 내 집은 물론이고 회사에서 눈치채면 안된단 말이다."
"알고 있어요."
백경일의 손끝이 올라왔으므로 몸을 비튼 문영애가 말했다.
"내가 어린앤 줄 알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있다가 내가 차 바꿔줄게. 돈을 줄 테니까 차 바꿔."
"지금 차도 괜찮은데" 했지만 문영애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것을 본 백경일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내가 네 눈치 모를 줄 알아? 아래층 아줌마 차 이야기를 너는 나한테 세번이나 했단 말이다."
문영애가 지금 타고 다니는 차도 산지 1년 반 밖에 되지 않은 중형차였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하면서도 문영애는 따라 웃었다. 그리고는 아예 몸을 일으켜 무릎 위에 앉았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