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범인터뷰] '상훈이의 용기가 때론 부럽다'
기사입력 2000년 01월 20일 11시 52분
메이저리그 강타자 딩고(닐슨의 주니치 등록명)의 영입에 이어 일부에서 흘러나온 트레이드설.
이토 대표가 구단이 앞장서서 트레이드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천명했지만 스프링캠프도 시작되기도 전 이래저래 마음 고생을 한 흔적은 무거운 표정에서 쉽게 읽을 수 있다.
답답한 심정. 주니치 이종범(30)이 자신의 속마음을 18일 숨김없이 털어놨다.
한적한 주택가의 허름한 맥주집.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따금씩 비수같은 오기가 서려있는 결심도 툭툭 튀어 나왔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유니폼을 벗을때 벗더라도 이대로는 안된다"고 몇번이나 되풀이했다.
지난 1년간의 악몽. 그렇게 씩씩하던 남편이 밤새 괴로워하는 모습에 부인 정정민씨도 많이 울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마냥 길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한시즌이 가고 새천년이 밝았다.
인터뷰가 거의 끝날 무렵 자리를 같이한 정정민씨는 "지금까지 일본에서의 기억은 다 묻어버리고 새출발을 하고 싶다"는 말로 남편의 속내를 대신했다.
－이번 기회에 하고 싶은 얘기를 다하면 어떨까.
▲할말이 없다(결국 두시간 넘게 시간이 흘렀지만). 이를 악물고 하는수 밖에 없다.
－메이저리그 밀워키 블루워스에서 딩고가 들어와 힘든 경쟁이 예상되는데.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신경쓰고 싶지 않다. 딩고는 딩고고 이종범은 이종범이다. 어차피 실력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다. 메이저리그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나보다 딩고가 잘 하라는 보장은 없다. 시즌이 시작되야 아는 것 아니냐.
－참,작년에 비해 몸이 무척 좋아진 것 같은데.
▲컨디션은 훨씬 좋다. (가슴을 불쑥 앞으로 내밀며)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해서 제법 근육이 붙었다. 열심히 하려는데 괜히 이런 저런 소문이 나서 솔직히 기분이 안좋다. 잘하는 상태에서 트레이드되는 것은 몰라도….
－만일 기존의 외국인 선수 고메스와 새용병 딩고가 1군에 출전, 2군에 떨어지는 일이 생기면.
▲만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때 가서 고민하겠다. 어쨌든 올 한시즌도 참을 대로 참으면서 견뎌보겠다. 기회는 분명히 온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니치에서 반드시 명예회복을 하겠다.
－기회는 오겠지만 적게 올수도 있지 않은가.
▲일단 오는 27일부터 시작되는 스프링캠프서 이토 구단대표와 만날 기회가 있다면 올시즌 발생 가능한 변수에 대해서 모두 얘기를 해볼 작정이다. 모든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
－적극적이라는 의미에는 타구단으로의 트레이드 요청도 포함되는가.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답하기 힘들다. 스프링캠프에 들어가기 전까지 생각을 정리하겠다.
－한국으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는가.
▲올해는 없다. 만일 올해 실패하면 미련없이 떠나겠다. 그때되면 당연히 한국팀에서 뛰겠다. (선배 선동열이 떠오른 듯)38세까지는 현역으로 남고 싶다.
－실제로 한국의 일부 팀에서 스카우트를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문도 있는데.
▲올시즌 만큼은 제발 한국 컴백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농담조로)집사람 고향이 수원인데 SK에서 뛰면 어떨까. 해태에서처럼 내 야구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관계 없다.
－작년말 한국에 갔을때 해태 김응용 감독과 많은 얘기를 했다는데.
▲감독님이 불러 주셔서 식사를 함께 했다. 올해는 감독과 싸워서라도 내야수로 복귀하는게 어떻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외야 포지션이 마음에 안드는가.
▲당장이라도 내야로 돌아가고 싶다. 외야에 있다보니 집중력이 많이 떨어지고 야구가 재미가 없다. 코칭스태프가 결정할 문제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입단 첫해인 98년 오른 팔꿈치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주니치의 팀 분위기를 바꿀 만큼 맹활약을 했지만 작년에는 타율 2할3푼8리, 9홈런, 24도루로 부진했는데 스스로 느끼는 문제점은.
▲볼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몸쪽 공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변화구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것이다. 초반에 생각만큼 타율 관리가 되지 않아 한방에 자꾸 욕심이 생겨 폼이 흐트러졌다. 올해는 장타보다 단타에 신경을 많이 쓰겠다. 일단 살아나가는게 중요하다.
－작전이 많이 걸려 기대만큼 `폭풍 질주'의 시범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일본 야구는 루에 있는 주자가 견제나 도루 실패로 죽는 것에 대해 무척 민감하다. 1루에 나가면 일단 희생 번트를 대 스코어링 포지션인 2루로 보내놓고 야구를 시작한다. 나는 달려야 신바람이 나는데 조금 신경질이 날때도 있다. 어쨌든 안타를 많이 치고 나가면 기회는 더 많이 올 것이다.
－작년말 둘째 딸 가현이도 태어나 1남1녀의 아버지가 됐고 새천년도 시작됐는데.
▲이제 내 나이도 계란 한판(30세를 의미)을 넘었다. 그만큼 어깨가 무겁고 가족의 소중함도 더 많이 느낀다. 호사다마라고 작년 새생명이 탄생하는 큰 일이 있어 부진했는지도 모른다.
－더 아이를 낳을 계획은.
▲둘도 벅찬데….
－17개월된 첫째 정후가 아빠를 닮아 운동신경이 좋은가.
▲맞다. 보통 아이들보다 성장이 빠르다고 한다. 공을 갖고 노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공을 던졌다하면 스트라이크다. 훌륭한 투수가 되려는지 모르겠다.
－커서 정후가 야구를 한다면.
▲내가 마음 고생한 것으로 족하다. 일본에 온뒤에는 운동을 시키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딸 가현이는 예술쪽으로 재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본에서는 차를 직접 몰고다니지 않는데.
▲택시를 부르면 5분내 오기 때문에 별 불편함이 없다. 구단이 택시 티켓을 주기 때문에 비용 부담도 없다.
－일어 실력은.
▲사는데 큰 불편만 없으면 되는 것 아니냐. 식당에서 밥시킬 줄 알고 택시 타고 어디나 갈 수 있으면 된다고 본다.
－일기를 쓰는 것으로 아는데.
▲생각날때마다 쓴다. 연예할때는 편지 한번 보내려면 몇번씩 연습하고 쓸 정도로 글 쓰는 걸 싫어했었는데…. 지금은 일기가 쓰고 싶을 때가 있다.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친구 이상훈과 선배 선동열이 떠나 나고야에 혼자 남게 됐는데.
▲상훈이의 용기가 때론 부럽다. 정말 잘 됐으면 좋겠다. 좀 외롭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시즌이 시작되면 혼자와의 싸움이다. 경기에 집중하다보면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때가 많다. 선수는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일단 경기장에서는 승부에만 집중하게 된다.
－올해는 나름대로 어떤 야구를 하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정해둔게 있는가.
▲작년에는 운동장에서 고개를 많이 숙이고 다녔다. 별로 얘기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올시즌에는 좀 시끄럽게 떠들면서 야구를 하고 싶다. 정신 건강에도 그게 좋을 것 같다.
－작년 팬들의 실망이 컸을텐데.
▲늘 송구스럽다. 이종범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올해는 꼭 보여주고 싶다.
[나고야＝양정석 특파원 js2000＠nuri.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