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칼럼] 서세원의 세상살이 (2)
기사입력 1999년 03월 07일 15시 22분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책을 보면서 유난히 기억에 남았던 장면들이 있다.
늦은밤, 서민의 복장을 하고 밤거리를 나선 왕….
그는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로 세상냄새를 맡고 오곤 했다.
이는 어떤 가식도 꾸밈도 가미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소리이자 모습이기에 왕에게는 지혜의 깨달음의 무한한 원천이 되곤 했다.
물론 나는 왕이 아니다.
하지만 공인으로서의 나의 위치를 생각해본다면 진정한 세상냄새를 맡는 기회란 쉽게 오지 않는 법이다.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 해가 저물고서야 시작되는 야외촬영 `택시드라이버'는 나에게 세상을 보는 또다른 눈을 갖게 해준다.
별다른 각본과 계산이 앞서지 않은 시간이기에 또한 실제로 거리를 달리면서 촬영이 이루어진다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돌발사태도 많고, 끊이지 않는 뒷얘기도 많다.
택시의 문을 열고 목적지를 말하던 승객들은 나의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잠시 당혹스러움을 표하지만 금새 친근한 이웃같이 그들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기도 하고 능청스럽게 노래 한 소절을 뽑아내기도 한다.
그런 그들 핸들을 놓칠뻔한 적도 많았다고 고백한다면 택시드라이버로서의 신뢰가 떨어지진 않을까.
택시를 타는 사람들에겐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뜻하지 않게 재물을 잃고 가족을 잃고, 심지어는 사랑을 잃고, 건강을 잃고….
크건 작건간에 무언가를 잃고 아쉬워하는 상실의 고통을 가슴 한켠에 묻고 있다는 것이다.
가출한 17세 딸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터뜨리던 어머니, 아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홀연히 집을 나가신 노부모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던 아들, 그리고 빅딜로 인해 직장을 잃고 한숨을 쉬던 젊은 직장인까지….
나는 그들의 눈물을 내 가슴에도 묻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희망이 있다는 소리다.
배짱이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언젠가 잃었던 것을 다시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끝까지 내가 서세원인지를 모르시다가 내리면서 만원권 지폐 한장을 택시비겸 불우이웃 성금으로 내주신 아저씨께 내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사는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리 참신하지도 않은 표현이었지만, 나에겐 잊혀지지않는 주옥같은 말로 가슴에 남았다.
"산다는거요?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죠."
[방송 M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