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드인 홍콩] 뒷골목 인생들의 자화상
기사입력 1998년 04월 22일 14시 38분
홍콩. 영국 식민지령의 종식을 고하고 중국에 반환된 `향기로운 항구도시'. 화려한 불빛 아래 동양과 서양이 만나 어우러진 첨단 미래도시.
수많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홍콩은 선망의 땅, 그 자체다. `메이드 인 홍콩'이란 라벨을 앞세운 `쇼핑의 천국'으로도 불린다.
그러나 프루트 챈 감독의 영화 `메이드 인 홍콩'은 이와는 전혀 다른 곳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홍콩의 뒷골목. 더럽고 음습한 빈민가.
프루트 챈의 시선. 아버지는 아내를 버리고, 어머니는 자식을 버린다. 이 와중에서 아이들은 목숨을 버린다.
급격하게 몰락하는 가치관으로 혼돈에 빠지고, 마약과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의 그늘에서 방황을 거듭하는 젊은이들. 프루트 챈은 이들의 분노와 허무, 고통을 `메이드 인 홍콩'이라고 이름붙였다.
중3때 `짤린' 차우(이찬삼)가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학교를 등진 차우가 흘러드는 곳은 자연히 뒷골목. 폭력과 협박으로 `자릿세'를 뜯어내는 해결사가 차우의 직업이 된다.
늘 맞고다니는 아롱(이동천)을 보살펴주던 차우는 우연히 시한부 인생의 소녀 핑(엄상자)을 만나 사랑을 키워간다.
어느날 이들은 투신자살한 한 소녀의 피묻은 유서를 주운 뒤, 절망과 배신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상실감에 빠진다.
자살한 소녀를 자주 꿈에서 만나곤 하는 차우는 아롱, 핑과 함께 소녀가 묻힌 공동묘지를 찾아간다. 무덤가를 뛰노는 이들의 얼굴에는 오랫만에 자유의 환희가 피어난다.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를 견디다못해 어머니도 가출하자 차우는 또한번 절망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핑에게도 죽음의 시간이 다가온다.
핑을 구할 돈을 위해 청부살인을 맡은 차우는, 그러나 차마 결행하지 못한다. 결과는 보복린치.
이 사이에 장기이식을 못받은 핑은 세상을 떠나고, 아롱도 조직원들에게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다.
복수에 나서는 차우. 총을 들고 음악에 맞춰 침대에서 춤을 추는 차우의 `건 댄스'는 분노와 상실감이 교차되는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
차우의 방에 걸려 있던 영화 `내추럴 본 킬러'와 `레옹'의 포스터, 핑의 방에 걸려있던 `아이다호'의 포스터는 감독의 암시였던 셈이다.
감동을 포함한 진실은 가슴을 울리는 법.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와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메이드 인 홍콩'은 슬픈 폭력의 에너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고 싶은 얘기를 속시원히 외치면서도 `나쁜 영화'와는 달리 정화과정을 거쳐 매우 감성적인 영화로 태어났다.
지난해 로카르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낭트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도 이같은 배경에서 비롯됐다.(5월2일 코아아트홀)
◇양윤모(영화평론가_서울예전교수)★★★★★, 조혜정(영화평론가)★★★★, 김경욱(영화평론가)★★★★★
[이창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