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수첩] 정신적 성숙 박찬호는 이제 거인
기사입력 1998년 03월 19일 15시 26분
플로리다 서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95번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커다란 자몽을 수천개씩 싣고 달리는 대형 컨테이너 트럭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오늘 아침에도 오렌지와 함께 이 지역의 특산물인 노란 자몽을 잔뜩 실은 트럭을 한대 보면서 `저 안에 빨간 한국 사과가 달랑 하나 들어있다면 얼마나 외로울까'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4년전의 박찬호가 그랬다.
늘 외로워하고 자리 찾기에 힘들어 했고, 별일이 아닌데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일이 많았다.
그랬던 박찬호가 완전히 달라졌다.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진출한 친구 조성민이 요즘 흔들린다고하자, 대뜸 "자리 때문에 정신적으로 흔들려서 일것"이라고 점술가처럼 집어내면서 "마음을 비워야 한다"라며 도인같은 소리도 한다.
작년까지만해도 스프링 트레이닝은 박찬호에게는 처절한 전쟁터였다.
첫해는 물정도 모르고 메이저리그를 노렸고, 둘째해는 메이저리그가 얼마나 부러운지 알면서도 트리플A로 배속 받는 아픔을 겪었다.
96년 간신히 메이저리그에 턱걸이 했지만, 얼굴없는 용병처럼 팀의 필요에 따라 구원과 선발을 오갔다.
97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했지만 스프링 트레이닝 마지막날까지 이를 악물어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가진 것 이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때문에 더 흔들리고 힘들었다는 것을 박찬호는 요즘 절실히 느끼고 있다.
올시즌 박찬호의 스프링 트레이닝은 풍요롭고 즐겁기만 하다.
마이너리그나 구원 자리 걱정 등이 하나도 없어졌고 오히려 1번 선발을 다툴 정도까지 왔으니 운동을 더 많이 열심히 해도 피곤함은 오히려 훨씬 덜 하단다.
마운드에 올라도 `오늘은 꼭 이겨야 한다' `반드시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따위의 중압감이 없어 게임은 오히려 더 잘풀린다.
공 하나하나에 힘을 싣고 정신을 집중해 뿌리는 것만이 요즘 박찬호의 명제다.
지난해까지 주위에서 그토록 많은 조언을 했지만 이해가 잘 안가던 부분들을 이제는 스스로 느끼고 깨닫는 경지에 온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먹는 나이야 사람을 구분 않고 찾아오는 법이지만 정신적인 성숙은 노력하는 자에게 먼저 오게 마련인가 보다.
박찬호는 이제 온통 주위를 둘러싼 자몽들 사이에서 유독 반짝이고 사랑받는 빨간 한국 사과가 되어 있다.
미국 야구에 도전하고 있는 다른 한국 청년들도 하루 빨리 박찬호처럼 반짝이는 빨간 사과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욕심일까.
[베로비치(미 플로리다주)=민훈기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