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직장인 '퇴직 스트레스'
기사입력 1998년 02월 08일 15시 27분
K사의 이모씨（39）는 요즘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곧 문을 닫을 것이 분명한 데도 사표를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퇴사를 하면 퇴직금이라도 챙겨 조그만 사업이라도 할 수 있지만 회사 사정이 어려운 데 자신만 살겠다고 약삭빠르게 사표를 내는 것이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
이씨는 "아내와 애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당연히 사표를 써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표를 쓰자니 동료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 게 뻔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며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는 신파조의 대사가 꼭 내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고 했다.
IMF 시대를 맞아 부도 기업이 속출하면서 직장인 사이에 `퇴직 스트레스'라는 신종 유행병이 점차 번지고 있다.
이 신종 질환은 명퇴나 정리해고 등의 실직에 대한 불안감과는 달리, 퇴직을 하고 싶어도 현실과 명분 사이에서 고민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직장인들의 신종 스트레스.
이같은 현상은 부도가 난 기업은 물론 자금사정이 어려운 중소업체에 근무하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화의신청을 한 P사의 경우 직원들이 월급을 반납하고 회사 살리기에 나서고 있으나 현 상태로는 기사회생이 요원한 상태.
이 회사의 박모씨（43）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전 직원이 월급과 상여금을 반납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나 혼자만 살겠다고 사표를 내는 게 정말 고민스럽다"며 "회사가 다시 일어선다면 다행이지만 현 상태로는 회생이 어려워 인정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같은 퇴직 스트레스는 2∼3월중 자금난으로 부도기업이 수백개에 이를 것이라는 우려가 대두되면서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대기업의 경우 그나마 퇴직금 보험에 들어 직원들의 퇴직에 대비하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부도가 나면 돈 한푼 못받고 회사를 그만두어야 한다.
서울 구로동의 한 기계상가에 다니는 현모씨（45）는 "회사가 부도가 나 퇴직금을 한 푼 받지 못할 입장에 처해있다"며 "지난해말 회사가 어려울 때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 동료를 욕했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그 친구의 용기가 부럽다"고 털어놨다.
신승철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이같은 증세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직장인 가운데 두드러지는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대인의 불안한 심리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며 "IMF 체제후 직장인들의 퇴직 스트레스는 더욱 번질 것 같다"고 내다봤다.
[강병원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