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시사회] 쁘아종-멀고도 험난한 '희망의 섬'
기사입력 1997년 04월 02일 14시 38분
술 취한 거리에서 내 이름은 독기어린 향수, 쁘아종. 혼탁한 거리에서 돌아오면 나를 기다리는 건 밤의 절망. 엄마의 품을 열듯 냉장고 문을 열고 그 불빛의 온기에 안겨 울고 싶었어. 사랑이 그리워…. 박재호 감독의 세번째 연출작 `쁘아종'(시네웍 제작)은 소외와 고독에 병들어가는 도시인의 절망과 이 절망에서 헤어나기 위해 선택한 사랑을 뚜렷한 명도대비로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박재호 감독은 전작 `내일로 흐르는 강'에서와 마찬가지로 줄곧 관심을 가져온 도시의 소외와 고독이라는 주제에 집착,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인생들을 `쁘아종'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내일로…'의 동성연애자들만큼이나 `쁘아종'의 인물들도 예사롭지는 않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택시기사, 남자들을 유혹해 몸을 파는 꽃뱀, 섹스와 마약에 찌든 형사 등. 이들의 공통점은 어두컴컴한 도시의 그늘에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다는 점. 그만큼 밝고 따뜻한 양지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이들이 답답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 것일까. 박재호 감독은 이들에게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맞부딪치길 강권한다. 수면제에 의지해야만 잠을 이루는 택시기사 정일(박신양)은 단절된 세상과의 유일한 대화통로가 소형녹음기다. 그러나 택시안에서 우연히 서린(이수아)을 만나고난 뒤, 녹음기에 독백을 남기는 대신 사랑의 자락을 발견한다. 몸을 팔아 떡볶기와 순대를 먹을 수 있다고 믿는 서린도 정일의 가방을 훔친 이후엔 타락한 세상대신 순수한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서린은 악마와도 같은 형사 영수()의 굴레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순수와 진실이 폭력과 거짓에 짓밟히는 세상을 향한 발산. 정일과 서린은 녹음기와 대화하거나 냉장고의 불빛에서 위로를 받던 도시의 고독을 강렬한 사랑으로 이겨낸다. 서린은 두 가지의 섹스로 타락과 순수를 대변한다. 정일과의 섹스가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희망의 팬터지라면 영수와의 섹스는 체념과 절망의 극치다. 굴레를 벗어던지고 떠나는 정일과 서린의 여정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더이상의 절망은 없는 듯 보인다. 스릴러적 구성을 띠는 마지막 장면조차도 박재호 감독은 관객에게 희망을 얘기하고자 한다. 러시아에서 수학하고 온 박신양의 `가벼운' 연기, 전라 등 온몸을 내던진 이수아의 열연, 의 감정연기 등도 박재호 감독의 `배수의 진'과 잘 맞아떨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