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영] 멋진 악역 한번 해봤으면

기사입력 1997년 04월 01일 14시 53분


80년 늦가을. 어스럼녘.
충주의 음악 다방.
그날도 스무살 안팎의 여자는 예외없이 다방문을 밀쳤다.
그리고 창가에 앉았다. 한잔의 커피를 마셨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녀는 한장의 `슬픈 엽서'였다.
"그녀는 휴학생이었다. 그맘때면 다방에 들리는 게 일과였다. 쓸쓸한 얼굴을 하고 창가에 앉는 것까지도. 풍문에 그녀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고 했다. 몹쓸 병에 걸렸다고 했다. 이따금씩 내게 커피를 보내 주기도 했다."
영화배우 (李璟榮．37)은 당시 스무살.
이 다방의 DJ였다. 그녀때문에 그는 이따금씩 더욱 허무해 졌다.
역마살이 끼여 로, 로, 충정도로 흘러 다녔다. DJ를 하며. 캐니 로저스의 `레이디'나 맹인가수 호세 페르시아노의 `한때의 사랑' 등은 늘상 틀어 대는 단골 레퍼토리.
특히 사랑과 시련의 아픔을 새긴 `한때의 사랑'에 빠졌다.
" 의대에 입학, 40일 정도 다니다 그만 뒀다.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 집안꼴로… 말이 좋아 DJ지 숙식제공이 고작이었다. 어쩌다 용돈 정도를 받았을라나. 그냥, 바람을 먹으며 살았다."
81년 입대, 84년 재대. 85년 연극영화과 입학. 스물다섯.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제대파가 나를 포함, 열명이나 됐다. 그런데 모두들 한가닥씩했다. 연기 도사들이었다. 나만 생짜였다. 째마리였다. 우울했다. 반작용으로 물리학에 빠졌다. 그러나 이것도 이내 신물이 났다."
에게 친구들이 꾀였다.
`제대파인데도 꿈꾸는 소년이었다. 황당하고, 종잡을 수 없고, 언제나 나사가 풀려 있었다. 그런데도 폐선(廢船)같은, 우울이 묻어 났다.'
당시 친구들의 기억이 아니라도 지금도 은 `얼빠진 성자(聖者)'다.
동기생들 중에는 영화배우 , 권해효, 개그맨 등이 있다.
그리고 `영화 천재'도 있었다. 그 천재가 보여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탈지어'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1, 2학년때. 8㎜와 16㎜짜리 단편영화에 출연한다. 한학기에 30편 정도의 출연제의가 쏟아 졌다.
그러나 알거지_은 가정교사 날품팔이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만했다. 방학때는 봉제공장에서 하루 18시간을 일했다. 그러나 월급은 고작 18만5천원.
`따라지 인생' `달동네' `구로아리랑' `노동의 새벽'이란 단어들이 어렴풋이 다가왔다.
3학년. 우연찮게 영화 `연산일기'에 출연한다. 중종역으로.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단역 아르바이트라도 하자는 의논이 돌았다. 내가 대표로 김영빈 선배를 찾아 갔다."
충무로의 여관_장으로 갔다. 장은 당시 영화인들의 아지트였다. 김영빈은 임권택 감독의 촬영보. 김영빈은 임권택에게 을 소개한다. 초를 잔뜩 쳐서. 운좋게도 중종역이 비어 있었다.
종종역의 극중 대사는 `어마마마, 미령하옵시다. 듣자와 왔는데 기력은 어떠하신지요?'가 전부. 병문안 인사였다. 개런티는 30만원.
평이 나쁘지 않았던지 이어 `아다다'의 주인공 수룡역을 맡는다. 이번엔 개런티가 껑충 뛰었다. 120만원.
"천지도 모르고 영화판에 뛰어 들었다. 영화는 미로(迷路)였다. 안개였다. 그런데도 기분은 삽상했다."
89년 대학 졸업. 은 이내 인기 배우가 된다.
`사의 찬미' `비오는 날의 수채화' `하얀 전쟁' `게임의 법칙' `세상밖으로' 등에 출연한다.
지금은 영화 `3인조'에 출연중. 부조리한 세상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의 꿈과 좌절, 그리고 사랑을 담고 있다. 은 밤무대 색소폰 주자로 나온다.
. 충주 태생. 예성초등학교_충일중_충주고 졸. 4남2녀 중 막내. 아버지는 비료공장을 해 유년기는 살만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새치가 나 `조로(早老)현상'(?)을 보인다.
중_고교 때는 아침잠이 많아 지각대장으로 악명을 떨쳤다. 일쑤 교무실로 호출당했다. 그러나 담임선생님에게 특유의 `눈웃음'을 쳐 면죄부를 받는 재주가 있었다.
영화배우 . CF에도 이따금씩 나간다. 그러나 썩 내키는 건 아니다.
"언젠가 껌 CF에 응했다. 4시간 촬영만으로 내 형님의 연봉보다 많은 액수를 받았다. 돈, 좋지. 그러나… 차라리 괴로웠다."
. 어수룩하다. 집살때의 에피소드. 우이동의 빌라를 집주인이 보여줬다. 그런데 방안에 엄청나게 큰 책상이 있는 게 아닌가.
"이 집사면 책상은 공짜로 끼워 줍니까?" "물론입니다."
은 즉석에서 집을 산다. 그 알량한 책상땜에 `왕 바가지'를 썼다.
이는 `식 책상 콤플렉스'의 후유증. 15평짜리 집에 살던 때. 한번은 버려진 큰 책상을 봤다. 횡재했다 싶었다. 집으로 낑낑대며 옮긴것 까진 좋았는 데 그걸 놓고 나니 사람이 비빌 공간이 없었다.
. 아직 미혼. 얼굴이 팔려 바람피는 건 포기 상태. 그러나 곧 결혼할 눈치다. 요즘은 에 빠져있다.
"희곡, 연출 감독에도 관심이 없지 않다. 그러나 `배우'가 우선이다. 더러는 `찬란한 악역'을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