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공화국] 두뇌전쟁 (12)

기사입력 1997년 03월 19일 13시 31분

중소기업체 이창희 사장. 집과 그동안 사두었던 부동산들을 저당 잡혀 근근이 회사를 끌어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직원들과 가족들도 회사가 어렵다는 것만 알고 있을뿐 엄청난 자금압박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직원들에게 일일이 술한잔씩 돌리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식비를 대신 지불하고 밖으로 나와 회사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차에 올라 핸들을 손에 잡았지만 시동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은 1억의 당좌가 돌아오는 날이며 이를 막을 돈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바로 부도를 맞게 된 것이다. 핸들에 얼굴을 파 묻었다. 철없는 아이들과 속으로만 애태워하는 아내의 모습, 고향의 노부모 얼굴이 뒤엉켜 머리에 떠 올랐다. 갈곳이 없다. 며칠만 지나면 집에 차압이 들어 올것이다. 내수도 수출도 되는 것이 없다. 한때 주위에서 부러워할 만큼 호황을 누리기도 했지만 벌써 2년 넘게 불황을 타고 있었고 이제 마지막 벼랑에까지 몰려 있다. 은행으로 사채 시장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우습지도 않던 1억원은 움켜 쥘 방법이 없었다. 머리를 들고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 나와 차를 몰고 천호동 천호대교까지 달려갔다. 차를 고수부지에 세워놓고 두 손을 주머니에 질러 넣은채 걸어서 대교로 올라갔다. 불빛에 반사된 한강은 아름답기 그지 없었고, 자동차들은 씽씽대며 잘도 달려갔다. "여보, 미안해…. 아이들 잘 부탁하고…. 나 없어도 용기 잃지말고 살아가…. 그리고…. 직원들도 너무 낙심하지 말고…." 신발을 벗었다. 옆으로 스쳐가는 승용차들은 많았지만 불황을 견디지 못한채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이 사람의 비통과 참담한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시계를 보며 기다릴 아내와 과외공부에 정신없을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는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지나던 행인들이 몰려 들었지만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심한 별들만이 하늘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 시간. "어쨌든 내년 대선에서 지지는 않아." 대통령은 서재의 의자에 앉아 97대선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역대 대통령중 집권당 아닌 후보가 당선된 일이 없는 나라다. `나도 민주당에 남아 있었다면 구경도 못했을거야.' ? ? ? ? ? 무수한 이름이 그의 머리에 명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