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웅] 악귀상륙 (1)
기사입력 1997년 02월 21일 15시 13분
개경은 태조 2년에 정도(定都)한 후로 5부방리(五部坊里)를 정하여 5부, 35방, 344리의 제를 만들어 통치한 고려의 수도였다. 그러나 고종 19년, 개경의 5부 제도를 로 옮긴 후 개경에는 유수병마사를 두었지만 잇따른 몽골의 침입으로 존립할 수가 없었다.
몽골의 침입기에도 지방 5도에 여전히 안찰사를 파견했으나 개경과 경기지역은 치안의 공백 상태였던 것이다. 집중적인 공략 목표가 되어 온 개경, 경기지방이다.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김준은 유수병마사 박황과 별초군 300명을 파견하여 치안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사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몽골군 무덕장군 왕창국의 기마군 2천명이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치안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는데 양국(兩國)의 통치 상태하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백주에 약탈과 살인을 하고는 몽골군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다. 또한 몽골군의 강간과 살인 등의 갖가지 행패를 박황이 단속하기에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낮이었다. 개경 북문 근처의 저잣거리에는 군중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이 남루한 차림의 농민들이었다. 이른바 시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곡상이나 고깃간은 보이지 않는 대신 집에서 쓰던 물건을 늘어 놓은 곳이 많았다.
물물교환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쇠솥과 생선 몇마리를 바꾸고 솜 한자루를 비쩍마른 개 한마리와 바꾼다. 그중에는 생명과도 같은 농기구를 늘어 놓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발을 멈추는 사람은 없었다.
거리 끝쪽의 초가 처마밑이었다. 처마의 그늘 밑에 헤어진 베옷 위로 거적을 둘러쓴 아낙네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머리를 숙이고 있었으므로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의 앞에 비슷한 자세로 앉은 여자애는 예닐곱살쯤 되어 보였는데 눈이 맑았다.
몽골 잡종은 아니다. 몽골의 침략으로 수많은 몽골계 아이가 태어 난 것이다. 사내 하나가 아이 앞에서 발을 멈췄으므로 여자가 머리를 들었다. 때에 절은 피부에 머리칼도 헝클어졌지만 이목구비가 반듯한 얼굴이었다. 사내는 말쑥한 용모였고 명주 옷에 가죽조끼를 걸쳤다. 그가 눈으로 아이를 가리켰다. "얼마여?" "보리 한자루." 여자가 짧게 대답하자 사내가 뒤에선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보리 한자루라는군." "우리가 아침에 먹은 걸 게워내면 아마 그쯤 될것이오." 일행 한명이 나섰고 사내들은 여자와 아이를 둘러 쌌다. "이걸 깨끗이 씻어 안고자면 춥지 않겠소." "에미도 반반 하구만 그래. 아직 쓸만해." 가죽조끼의 사내가 주머니를 풀더니 은자 두닢을 꺼내어 여자 앞에 던졌다. "보리 두 자루 값이다." 뒤에 섰던 사내 하나가 매가 병아리를 채듯이 아이를 안아 들었다. 거적이 떨어지고 벌거벗은 아이의 하반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이는 울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사내의 허리에 끼어진 채 이제는 잠자코 어미를 바라볼 뿐이다.
시선을 내린 여자가 머리를 끄덕였다. "가시오." 그녀는 앞에 떨어진 은자를 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