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니버스 소설] LOVE LOVE LOVE....이규형(34)
기사입력 1996년 07월 09일 13시 56분
///// 서머 타임(11) ////. 새벽 바닷가를 걷는 동안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간절히 하고싶은 말이 있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입을 떼지 않는다. 이럴 경우엔 기다리는 게 좋다. 말을 재촉하게 해선 본인의 심정이 변할지도 모른다. 해변의 끝 모래사장에 섰을 때야 그녀는 결심한 듯 했다. "전 더이상 못견디겠어요, 더이상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녀는 아까 호텔룸에서와 마찬가지로 양뺨에 끊임없는 눈물의 강을이루었다. "난 이해가 안되네요.
우리 좋지 않았습니까.
진짜로 유미씨랑나랑...". 그는 아직도 자신에게 뭔가 실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터이다. "그게 아니에요. 내가 속인 거란 말이에요. 애초부터...". 그는 그제야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표정을 마주했다. 뭔가 있기는 있구나. "김준, 33세. 신경외과의사. 난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는 아직도 감이 안잡혀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난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준씨 눈에 띄기위해 이호텔에 묵은거예요". "설마! 그게 무슨...". "저 술집에서 일해요. 준씨 병원 원장님이 우리 집에 자주 오세요". 거기까지 얘기를 듣자 모든 것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잠깐, 그럼 프레드릭 포사이드 책을 읽고 있었던 건 나때문이란 말인가?". 그가 소리치듯 묻자 그녀는 그렁그렁 눈물을 줄줄 흘리며 끄덕인다. "원장선생님이 여러가지 힌트를 줬어요". "빌리 조엘가 엘튼 존도 원장이 가르쳐 준건가?".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며 역시 긍정한다.
그는 이제 조소를 머금은 채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벽 푸른빛의 바다는 더할 나위없이 신선하다. 거기에 비해 곁에 있던 여자에게선 너무도 속물적인 냄새가 난다.장유미가 그렇다기보다는 인간세계 구조에 대한 역겨움이다. 돈으로여자를 사서 나를 위로하려고 비행기로 딸려보낸다. 그리고 연극을 꾸며 내가 좋아하는 책과 음악으로 내 주위를 끌고 결국엔 정사까지... "얼마를 받았지요. 유미씨는?". 그는 모욕적으로 들릴 그 말을 거침없이 뱉었다. 그 자신이 받은 실망감은 모욕 그이상이었다. 이제 비로소 내 인생의 임자를 만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돈은 받지 않았어요. 비행기표와 호텔예약 밖에는... 물론 원장선생님은 잘돼서 돌아가면 사례를 하겠다고 했지만 그것 때문에 온 것은아니에요". "잘 된다는 말은 내가 여기서 유미씨한테 그대로 속아 넘어가고 우린 그런 생태로 헤어지게 된다는 스토리인가?". 그녀의 말없음은 긍정이다. 그는 몸에서 기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털썩 모랫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신음하듯 읊조렸다. "바보같은 짓들을 하고 있어. 모두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