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무정] <제18화> 애욕의 소용돌이 (9)
기사입력 1996년 06월 19일 17시 04분
아귀는 눈을 질끔 감았다.
수박이 터지는 듯한 음향이 그의 고막을 때렸다.
아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결과였다.
모골이 송연해 지는 아귀.
‘아뿔싸’
남녀의 방사(房事)를 구경하는 취미를 가진
그가 이번에는 살인의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무림인들 사이의 생과 사는 늘상 일상적인
사건이며 사고였다.
하지만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여인은 무림이 아니었고 사원 역시도 무림인이라는
신분을 망각한 행동이었다.
‘설마 사원이 그토록 잔인하게 죽일수가..?’
아귀는 지붕에 거꾸로 매달려 창틈으로 몰래 숨어보다가
진저리를 쳤다.
본래 그는 사원과 모용추의 뒤를 미행하여 동침하는
광경을 엿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모용추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그녀를 대신하던 상관옥은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아귀는 무적도 사원이 몹시 분노한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의 짐작은 빗나가 있었다.
무적도 사원.
그는 울고 있었다. 피범벅의 여인,
상관옥을 앞에 두고 그는 눈물짓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대황의 고수를 눈물짓게 하는가.
아귀는 이해하지 못한다.
무적도 사원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리라 여기던 아귀다.
더구나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무지막지하게 때려 죽이고는
왜 무엇이 서러워 운단 말인가?
이때 인기척이 일어나며 모용추가 등장했다.
아귀는 숨을 멈췄다.
경공과 신접에 남다른 재간을 지니고 있는 아귀는 은신술에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재주가 없었다면 수많은 남녀의 환락장면을 절대로
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용추는 아귀의 존재를 미처 눈치채지 못한 듯 방안의
동태에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사원은 이제 너마저 때려 죽일 것이다.’
아귀는 박쥐마냥 매달려서 내심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모용추는 영원한 그의 원수가 아니던가.
그러나 모용추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치며 사원의 방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매우 진지하여
전혀 음모를 꾸민 사람 같지는 않았다.
아귀는 사원이 문을 박차고 달려나와 엉뚱한 수작을
부린 모용추를 단칼에 베어버리길 희망하고 있었다.
모용추는 달빛이 무색할 정도의 미소를 흘렸다.
매우 의미있는 웃음이었다. 그녀가 사라지자 아귀는
다시 창틈 안을 들여다 보았다.
사원은 변태인가.
그는 단번에 술병을 내리쳐 절명케 한 상관옥의
시신을 품에 안고 있지 않은가.
더 이상의 눈물은 없었다.
단지 짐작하기 어려운 회한의 눈빛만이 암흑속에서 반짝이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