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동풍(東風)은 용(龍)을 부르는가(15)
기사입력 1996년 05월 24일 17시 17분
척….
벽에 걸려있는 신검을 낚아채는 손은 고왔다. 그러나 그 칼을 움켜쥔 사내의 눈빛은 형용할 수 없는 분노와 비애와 증오와 절망으로 충만되어 무서웠다.
"죽일 놈!"
칼을 쥐고 있는 사내가 소리쳤다.
침상에서 운우의 쾌락으로 치닫던 남녀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벌거벗은 사내는 반사적으로 소리칠 뿐이다.
"형?"
칼을 거머쥔 사내는 일소야였다.
동방산장의 장자이며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한 일소야.
"네가 정녕 내 아우란 말이냐? 절대 그렇지 않다."
일소야는 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는 신검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이소야도 제정신은 아니다. 그는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다. 자신의 칼에 두토막 나기를 원하는 듯하다.
모용추가 날카롭게 지시한다.
"그를 해치워요…."
이소야는 그제서야 움직임을 보였다. 서생인 일소야의 수중에서 자신의 애검을 되찾는 일은 한 손으로 식은 죽 먹기다.
이소야는 가볍게 신검을 회수하며 도리어 그 칼로 쇄도해 오는 일소야의 심장을 향해 찔러갔다.
동작은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웠고 완만하면서도 급박한 변화가 있었다.
팟-- 피가 튀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일소야의 눈빛이 튀었다. 모용추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도 튀었다. 이소야의 비명도 튀어 오르고 있었다.
"으헉."
이소야는 눈을 떴다.
꿈이었나? 형 일소야…모용추…꿈이었나?
두번 다시 기억하기 괴로운 과거의 악몽이 떠올랐다. 왜 어떻게하여 자신이 형의 정혼녀이더 모용추를 범하려 했을까?
그리고 그 당시 어째서 무공을 전혀 모르던 형을 찔렀을까? 그 혼란과 절망은 아직도 이소야를 죽음의 벼랑위에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이소야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상처는 온통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통증이 뒤따랐지만 이미 그건 초월한 상태가 아니던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단편적인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난 왕자궁으로 제왕학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다. 심한 중상을 입고 문가에서 쓰러졌지. 누군가 날 치료해 주었는데 그 손길은 참으로 부드러웠다.
대관절 얼마나 지난 것일까?
이소야의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문이 열리며 훤칠한 생김새의 무현왕자가 방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이다.
"깨어나셨구려."
"왕자님…?"
이소야가 침상에서 내려오려는 것을 가로막는 무현.
"고맙소, 정말 고맙소."
무현의 따스한 손이 이소야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 손길은 까마득하게 느꼈었던 바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줬던 부드러운 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