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작년 자원봉사자 4만여명…친구·연인·가족 단위로 봉사 하기도
지난 4일 낮 12시 서울 명동예술극장 앞. 한 남성이 거리에 설치된 빨간 자선냄비에 따뜻한 마음을 전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온 국민이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으로 긴장했던 전날 밤이 무색하게 거리에선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세군 사관이 울리는 종소리였다.
밤새 졸였던 마음을 뒤로 하고 케틀메이트(자선냄비 자원봉사) 일일 체험에 나섰다.
황민태(29) 구세군 사관생도가 봉사자용 빨간색 패딩을 건네주면서 "케틀메이트가 구세군의 얼굴이 되는 만큼 정해진 복장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구세군 종은 무거웠고 듣기 좋은 소리를 내기도 어려웠다. 요령이 필요했다. 황 생도는 "반동을 이용해 위로 올리듯 치면 수월하다"고 설명했다.
마이크도 찼지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용기를 내 목소리를 냈다.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눠주세요."
하지만 행인들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추위를 피하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지나쳤다.
10여분 후 한 여성이 1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자선냄비에 넣었다. "조금이라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감사 인사를 하는 황 생도를 따라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후 기부가 이어졌다.
한 기부자는 "어젯밤에 잠도 잘 못 자고 어수선한 마음으로 출근했는데 자선냄비가 보여서 반가웠다"며 "저라도 마음을 보탠다"고 말했다.
혼자서 종을 울린 지 한 시간쯤 지나자 구세군 악단이 찾아왔다. 4대의 관악기로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주하자 사람들이 몰렸다. 모금액도 늘었다.
악단원은 "이렇게 모금 장소를 돌면서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한다. '루돌프 사슴 코'가 호응이 제일 좋은 것 같다"며 웃었다.
이날 기온은 영상 3도. 그러나 건물 사이로 바람이 불어 체감기온은 영하였다. 길바닥 위로 냉기가 올라왔다. 지난주에 내린 눈이 아직 얼어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몸에 핫팩을 붙이고 옷을 여러 겹 껴입었다. 장갑과 귀마개로도 무장했지만 발이 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2시간 넘게 밖에 서 있으니, 얼굴이 굳어 웃음도 지어지지 않았다.
언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주변 상인이 "상자를 바닥에 깔고 위에 올라가면 발이 덜 시리다"는 '꿀팁'을 전했다. 따뜻한 캔 음료를 쥐여주기도 했다.
잠시 교대를 해주기 위해 들른 황 생도는 "취객이나 소음 문제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으면 명동 거리 상인회 분들이 도와주기도 한다"고 했다.
3시간 동안 35명의 시민이 명동 자선냄비를 찾았다. 1천원과 1만원짜리 지폐를 넣는 사람이 가장 많았고 5만원을 기부하는 사람도 두세 명 있었다. 달러, 엔화 등 화폐 종류도 다양했다. 명동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은 덕분이었다.
직장인 박서영(32) 씨는 "마침 잔돈이 남아서 넣고 간다. 구세군 종소리를 들어야 연말 분위기가 난다"고 말했다.
구세군에 따르면 지난해 자선냄비 거리 모금에 참여한 자원봉사자 수는 4만1천여 명이다. 보통 2인 1조로 구성되지만 경우에 따라 1인 또는 친구, 연인, 가족 단위로 봉사를 하기도 한다.
구세군 관계자는 "작년은 재작년에 비해 자선냄비 수가 줄면서 자원봉사자 수도 줄었지만, 매년 좋은 마음으로 봉사해 주시는 분들은 있다"고 말했다.
오후 4시부터는 동대문역으로 자리를 옮겨 모금 봉사를 이어갔다.
이곳에서 함께 한 봉사자는 외국인이었다. 몽골에서 온 대학생 퓨레브슈렌(25) 씨로, 학교 과제를 위해 봉사를 신청했다고 말했다.
5년 전 한국에 온 그는 "지금까지 왜 봉사활동을 안 했을까 후회했다"면서 "다른 구세군 봉사 활동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구세군 관계자는 "동대문역에서는 노인 분들이 많이 기부해 주신다"며 "큰돈이 아니더라도 여러 분들이 힘을 보태주신다"고 말했다.
동대문역에서는 4시간 동안 시민 27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오랜 시간 냄비를 지키다 보니,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만 봐도 기부하려는 사람을 예측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
바라보기만 하다가 부모를 졸라 돈을 집어넣은 아이, 짐을 한가득 들고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모금하는 어르신, 몇 년 전 구세군의 도움을 받아 고마웠다는 기부자도 있었다.
구세군에 따르면 작년 거리 모금 액수는 21억6천만원으로 2022년에 비해 1천만원 줄었다.
구세군 측은 "코로나 이후 모금액은 증가세를 보였지만 작년에는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했다"면서 "경제가 어려워졌음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올해로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은 96년째를 맞았다. 올해 모금은 이달 31일까지다.
오늘도 전국 316개 자선냄비 주위에서는 종소리가 울리고 있다.
kuun@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