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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의 '역사속 인물과 와인' ⑨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 그리고 '퓌어르스트 폰 메테르니히 트로켄'

김형우 기자

기사입력 2018-07-23 10:33


메테르니히 초상화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Furst von Met´ternich, 1773-1859)는 지난 세계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외교관이자 정치가다. 그는 19세기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상, 그리고 훗날 비엔나의 사자로 30여 년간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입신한 나폴레옹이 1800년대 초, 10여 년 동안 유럽전역을 그의 말발굽 아래 휘저어 놓았다.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거의 모든 유럽의 나라들이 맥없이 그의 군마와 야포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는 없었다. 영국을 위시한 프러시아, 스웨덴, 러시아, 오스트리아 등이 유럽연합을 결성, 나폴레옹에 맞섰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연이은 악수를 두었다. 모스크바 전투,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1815년 6월의 워털루 전투에서의 패배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상이던 메테르니히는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시대가 막을 내릴 것을 내다보고 발 빠르게 비엔나 전승국 회의 개최를 서둘렀다. 나폴레옹 이후의 신질서를 다듬기 위한 포석이기도 했다. 비엔나 회의는 1814년 9월에 시작해 이듬해 6월에 끝난 전 유럽 국가 간의 국제회의였다. 회의의 본질은 나폴레옹이 그간 헝클어 놓은 유럽 여러 나라의 국경을 다시 조정하고 영국, 프러시아, 러시아, 오스트리아 4강에 프랑스를 포함한 이른바 5강이 가지는 이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었다. 첨예한 이해득실이 걸려 있었기에 유럽의 여러 제국, 왕국, 공국 등 200여 개의 나라 대표들이 비엔나에 운집했다.

회의는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가 주재했다. 그러나 당초부터 각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엉켜있었기에 회의의 진행은 더디기만 했고 결과는 쉽사리 도출 되지 않았다. 매일 저녁 파티와 유흥으로 날을 샜다. 이런 회의를 빗대어 "회의는 움쩍도 않고 춤만 추고 있다"는 비아냥이 쏟아지기도 했다. 비엔나 회의의 최종 결의서는 1815년 6월 18일 서명되었다.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해 100일 천하를 호령하다 끝내 워털루에서 패퇴하기 9일 전이었다. 이에서 결의된 기본 틀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때까지 100년 동안 유지되었다.


라인강변에 있는 슐로스 오하니베르크 와이너리와 포도밭
이 회의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무대 연출가는 단연코 오스트리아의 외상이면서 회의를 주재한 메테르니히였다. 그의 회의 조정 능력과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역할은 탁월했다. 비엔나 회의의 성과에 지극히 만족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시스 2세는 그의 공로에 대한 보상을 내렸다. 1816년 7월 라인 강변에 있는 유서 깊은 와이너리 슐로스 요하니베르크(Schloss Johannisberg)를 그의 영지로 하사했던 것이다.


퓌어르스트 폰 메테르니히 트로켄
원래 이 포도밭은 베네딕트 수도원이 소유했었다. 이 곳에서 와인을 빚어 세례 요한을 위해 헌정했었다. 1716년 대사제는 종전의 사원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바로크풍의 새 사원과 와인 셀러를 지었다. 그리고 리슬링의 포도 묘목을 식재했다. 포도밭의 주인은 역사의 물결에 따라 몇 차례 바뀐 일이 있었으나 1816년 메테르니히 후작이 새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주인은 헨켈&죈라인(Henkell & Sohnlein)이다. 이 집에서 빚은 와인 가운데 '퓌어르스트 폰 메테르니히 트로켄'이 그의 이름을 레이블에 얹고 있다. 현재 이집의 리슬링 와인은 세계적 명주로 하이트진로가 국내에 들여오고 있다. <와인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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