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매치가 없는데도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은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 캐나다월드컵에서 첫 16강 신화를 썼고, 광저우, 인천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따냈으며, 평양의 기적을 썼다. 등록선수 1600명의 대한민국 여자축구가 세계무대에서 밀리지 않는 이유는 FIFA 관계자도 궁금해할 만큼 '미스터리'다. 이들의 경이로운 투혼은 한국 여자축구 선수라는 책임감과 간절함에서 나온다. 후배들이 자신보다 나은 길을 가야 한다는 것, 반드시 '꽃길'을 물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여축' 에이스들은 이구동성 "우리는 축구선수로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다. "우리나라 여자축구가 아직 성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을] 유소녀 축구 발전 간담회를 다녀왔는데 울 뻔했다. 10년 전 등록선수와 현재 팀수, 모든 게 정체 상태였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축구선수로 성공했다지만 우리는 성공하지 않았다. 니네는 성공했다고 생각해? (지소연과 조소현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아니야. 우리가 성공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나라 여자축구가 성공하지 않아서…. 미국 가기 전엔 내 꿈, 내 열정뿐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우리나라 여자축구가 얼마나 열악한지 깨달았다.
[소현] 일본도 우승했잖아. 우리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축구의 꿈을 놓지 못하고 아직도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같아.
[가을] 19세 때 써놓은 일기장에 축구선수로서의 1막은 27세가 끝이라고 써있더라. 근데 아직 꿈을 못이뤘다. 여기서 그만 두면…, 그래서 이렇게 계속하고 있다. 스물일곱에 끝이었는데 끝내지 못했다. 공허하다. 후배들을 생각하면 어깨가 무겁다. 우리를 보고 꿈을 키울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한발 더 뛰어야 한다.
[소연] 우린 매순간 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면 여자축구의 미래가 없다. 후배들을 위해서 달려야 한다. 그 부담이 정말 크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매경기 이를 악문다.
[가을] 나는 후배들이 우리처럼 이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걱정된다. 환경이 더 열악해졌다. 우리가 끝나면 끝나버릴까봐 걱정 된다. 여기까지 열심히 온 건 후배들에게 좋은 길을 걷게 하고 싶어서였는데…. 솔직히 지금은 명예직이다. 책임감으로 계속 가고 있다. 이렇게 열심히 왔는데 우리 후배들은 더 힘들다. 내가 힘들게 간 길을 똑같이 가고 있다. 너무 허무하다. 일단 내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대표팀 선수로서 보여주는 것, 그래서 후배들한테 동기부여가 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우리 A대표팀 선수들을 보고 후배들이 꿈을 키운다.
|
그 외롭고 힘든 길을 엄마가 된 후 '대물림'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에이스 3명의 생각은 다 달랐다. 지소연은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재능이 있든 없든 무조건 시킨다고 했다. "엄마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다. 전가을은 "재능이 있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조소현은 "재능이 있어도 시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소연] 딸을 낳으면 무조건 시킬 거다. 아들도 시킨다. 다른 선택은 없다. 재능 없어도 무조건 시킨다. (손)흥민이 아버님처럼 무조건 시킨다. 축구선수
[가을] 나는 모르겠어. 재능이 있다면 시켜야지. 미국은 여자축구팀이 6세반부터 있다. 8세, 12세, 18세 연령별로 다 돼 있다. 여자애들이 정말 열심히 공을 찬다.
[소현] 나는 안시킨다. 메시급 재능이어도 안시킨다. 너무 힘들다는 걸 아니까
|
2019년 프랑스월드컵을 향한 꿈은 같았다. 2년 전인 2015년 캐나다월드컵은 김정미, 박은선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A대표팀 선수들에게 첫 도전이었다. 기적같은 투혼으로 16강에 올랐다. 두 번째 도전이 될 프랑스월드컵에선 더 높은 곳을 꿈꾼다. A매치 평가전을 원하는 것도, 더 잘 준비하고 싶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 남았다. 과정이 중요하다. 협회의 여자축구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다. 우리는 2년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야한다. WK리그에서 최선을 다하고, 협회에서도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셨으면 한다. 미디어들도 많이 홍보해 주셨으면 한다. 지금 우리가 해나갈 과정들에 충실하겠다.
[소현] 2년간 우리도 잘 준비하고, 협회도 함께 준비하고 배려해 줬으면 한다. WK리그와 협회가 배려하고 상생하면 좋겠다.
많은 후배들이 해외로 많이 진출햇으면 좋겠다. 외국 선수들을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했으면 좋겠다. 나가서 실패를 해도 괜찮다. 대표팀에서 경기하면 확실히 자신감이 생긴다. 조금더 나가서 경험하고 도전했으면 좋겠다. 소연이도 일본에서 뛰면서, 우리도 일본처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일본에서 뛰면서 똑같이 느꼈다.
[소연] 나는 '일본 잘하잖아요' 그런 말을 듣는 게 너무 싫었다.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그런 이야기부터 하면 힘 빠진다. 우리도 할 수 있다. 경험하고 도전하면, 우리도 분명 할 수 있다.
[가을] 어린 선수들이 해외에서 많은 경험을 해보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한국 여자축구를 위해 그라운드에서 청춘을 바친 이들은 현장의 문제에 대해 선수로서 할 말을 했다. 자신이 걸었던 길보다 후배들이 더 나은 길을 걷길 원한다. 지난 10여 년의 분투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며 리그와 대표팀을 위한 제언을 쏟아냈다.
[소연] WK리그 여자선수들은 3년차와 10년차 연봉이 같다. 연봉 상한선이 있기 때문이다. 10년차에겐 동기부여가 안된다. 상한선 없애야 한다.
[가을] 그래서 어떨 때는 명예직이라고 생각한다.
[소연] 우리도 상한제가 있었는데 없어졌다.
[가을] 미국도 없어졌다. 내가 하는 만큼, 뛰는 만큼 벌어간다.
[소연] 연봉 상한선을 없애면 기업구단은 몰라도 시도민 구단들은 힘들다고 들었다. 여자축구는 수입이 안나니까.
[가을] 어떤 식으로든 연차에 따라 연봉은 좀 올랐으면 좋겠다. 보이는 것이 있어야 어린선수들도 꿈을 갖는다. 그래야 부모님들도 딸들에게 축구를 시키지 않겠나.
[소연] 자주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드래프트 규정도 바뀌었으면 한다. 현재 WK리그 규정은 해외진출 선수도 한국에 들어올 때는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 내가 첫 사례라서 맞는 규정이 없다. 속상하다. 한국에 들어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다. 마지막은 한국에서 마무리하고 싶다. WK리그에서 뛰면서 팬들의 관심을 끌어올리고 싶다. 그게 제도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소현] WK리그를 월, 금요일이 아닌 주말에 했으면 좋겠다. 더 많은 팬들과 함께하고 싶다. 월요일 7시에 경기장에 오기는 너무 힘들다. 미국, 일본, 잉글랜드 다 주말에 경기한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
"저희 플레이를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요. A매치 열어주세요." "저도 한국에서 A매치 평가전을 뛰고 싶습니다." "전가을, 조소현을 보고 싶다면 월, 금요일 WK리그, 인천 남동경기장으로! 지소연을 보고 싶다면 첼시로 오세요!" 손하트 포즈와 함께 '여축' 에이스들이 활짝 웃었다.
인천=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