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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승천하지 못한 '드래곤즈' 이야기

임기태 기자

기사입력 2014-10-28 09:46 | 최종수정 2014-10-28 09:46



이번 라운드 가장 '슬픈' 골이었다. 후반 49분 극적인 동점골을 넣은 코니가 원정 응원석으로 달려갔을 때, 벤치에서는 안타까움에 탄식했다. 같은 시각 울산이 성남에 역전한 사실을 몰랐던 선수들은 세상을 다 얻은 양 좋아했고, 이들을 바라보던 하석주 전남 감독은 고개를 떨궜다. 26일 오후 인천 축구전용경기장, 2014 현대오일뱅크 33라운드 인천과 전남의 경기(3-3무)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건은 지난 주말(18일) 서울과의 홈경기에서 터졌다. 선수, 코칭 스태프, 관중 외 다른 요소에 의해 두 팀의 승부가 갈린 것. 후반 추가시간 현영민의 크로스를 골로 연결한 스테보의 슈팅은 제2 부심의 오프사이드 선언으로 취소됐다. 끝내 1-2로 패한 전남은 빈손으로 경기를 마쳤고, 다음날(19일) 석연찮은 PK로 상주에 승리한 울산에 '6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2014 현대오일뱅크 K리그클래식 대회 요강에 따르면 순위는 '승점-득실차-다득점-다승-승자승-벌점-추첨'에 따라 결정된다. 이에 따라 7위 전남이 상위 스플릿의 마지막 티켓 한 장을 차지하기 위해선 세 가지 경우의 수 중 하나를 충족해야 했다. (A) 6위 울산 승 → 7위 전남 승(울산이 앞선 득실 + 9골 이상 득점). (B) 6위 울산 무 → 7위 전남 승(득실 상관 없음), 무(9골 이상 득점). (C) 6위 울산이 패 → 7위 전남 승, 무(이상 득실 상관 없음).

승점 44점의 같은 선상에서 정규리그 마지막 라운드를 맞았지만, 처지는 엄연히 달랐다. 전남이 맨발로 출발선 앞에 섰다면, 울산은 값비싼 스파이크화를 신고 있었다. 전남으로선 근소하게 앞서 있는 울산이 고꾸라지길 바랄 수밖에 없는 입장. 맨발로도 죽기살기로 뛴 전남은 3-1의 스코어를 3-3으로 만드는 명승부를 펼쳤지만, 끝내 승천하지 못했다. 환희와 눈물, 희망과 좌절이 여러 갈래로 얽혀 있던 이들의 이야기를 시간 순으로 재구성한다.

인천(3) : 디오고(1'), 문상윤(68'), 진성욱(79')

유현(GK) / 박태민-이윤표-안재준-용현진(문상윤,38') / 김도혁(임하람,78')-구본상 / 최종환-이보-이천수 / 디오고(진성욱,64')

전남(3) : 안용우(15'), 코니(87',94')

김병지 / 현영민(코니,76')-홍진기-임종은-김태호 / 이승희-송창호(김영우,72') / 심동운(김영욱,55')-이종호-안용우 / 스테보



[오후 1시 16분] 그칠 줄 몰랐던 하석주 감독의 속풀이

경기 전 취재진과 만난 하 감독. "뭐 이렇게 많이들 왔어요. 관심이 많은가 보네요."라고 운을 뗀 속풀이는 30분가량 이어졌다. 가능성이 완전히 닫힌 건 아니었으나, 높지도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했고, 어떤 결과가 나와도 선수들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 팀엔 저평가된 선수가 많아요. 성적이 안 좋다 보니 연봉도 많이 못 챙겨줬고요", "아시안게임 다녀온 선수들이 긴장이 풀리면서 체력적으로 굉장히 많이 떨어져 있어요", "(서울전)오심도 인정해야 할 일이지요". 하 감독의 담담한 어조는 전혀 담담하지 않은, 결코 담담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오후 2시 1분] 전반 1분 만에 내준 실점, 먼저 넘어진 전남

초반부터 의욕이 넘쳤다.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 몸을 사리지 않고 부딪히며 공격 기회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후방의 취약함이 전남의 질주를 방해했다. 이종호가 등 떠밀린 장면에서 프리킥을 얻은 전남은 세트피스 직후 최종환에게 역습을 맞는다. 속도 경합을 벌인 홍진기가 가까스로 넘긴 위기는 임종은에게로 넘어간다. 이보에게는 임종은의 등 뒤로 침투하는 디오고를 향해 볼을 배달할 능력이 있었고, 슈팅 각도를 훤히 열어준 전남은 경기 시작 1분 만에 선제골을 내주고 만다. 굳게 다진 필승의 의지가 채 2분도 가지 못한 상황. 환호하는 인천 선수들 사이에서 골키퍼 김병지는 아쉬움을 곱씹었다.

[오후 2시 15분] 안용우의 동점골에 다시 살아난 불씨

전남은 극심하게 흔들렸다. 수비 진영에서 패스미스를 남발한 사이, 최종환과 박태민을 깊숙이 배치한 인천의 왼쪽 측면 공격에 힘겨워했다. 다행히 동점골이 늦지 않은 시점에 나왔다. 스테보의 스루패스를 향해 뛰어든 안용우는 상대 수비와 골키퍼 사이에서도 신체 밸런스를 잃지 않았고, 기어이 골을 완성했다. 리그 내 손에 꼽힐 만큼 루즈볼 처리가 빨랐던 골키퍼 유현을 앞지른 슈팅. 안용우는 하 감독에게 안겼고, 벤치로 달려온 전남 선수들은 다시 한 번 승부욕을 불태웠다. 인천에서 치열하게 치고받는 동안, 성남(성남-울산)에서는 이호의 슈팅 첫 슈팅 외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오후 2시 37분] 울산 따르따의 선제골로 전반 종료

전남의 플레이에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뒤처진 경합 상황에서도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후방에서 넘어온 긴 패스가 옆줄 밖으로 나갔다고 생각해 멈춰선 순간, 이종호는 인천 수비를 앞질러 볼을 살려냈고 공격 기회를 하나 더 늘렸다. 줄곧 몸을 내던졌던 이 선수의 왼쪽 어깨에는 녹색 잔디 물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 시각 성남에서는 울산의 선제골이 나왔다. 전반 37분 측면으로 벌려 뛰던 양동현의 패스와 부지런히 뛰어들던 따르따의 슈팅이 첫 득점을 만들어냈다. 인천과 전남의 경기는 1-1, 성남과 울산의 경기는 0-1로 전반전을 마쳤다.

[오후 3시 13분] 조연 성남의 주연 욕심, 9분 만에 만든 역전

하 감독은 경기 전 1993년에 일어난 '도하의 기적'(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중 경기 종료 10초 전 이라크에 동점골을 내준 일본 대신, 북한을 3-0으로 꺾은 대한민국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언급했다. 급변하는 상황에 따라 전략 수정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 "후반전부터는 휴대폰으로 성남-울산의 상황도 확인하려고 해요"라며 덧붙였다. 후반 초반 성남은 역전에 성공하며 울산과 전남의 싸움에 색다른 재미를 몰고 왔다. 제파로프의 프리킥을 머리로 돌려놓은 김태환, 김동희가 얻은 PK를 파넨카킥으로 처리한 제파로프의 연속골에 조민국 울산 감독은 울상이 됐다. 이대로 끝난다면 상위 스플랫행은 전남의 몫이었다.

[3시 25분] 김동섭의 골에 웃다 문상윤의 골에 운 전남

후반 중반으로 접어들었지만, 일단은 정상적인 경기를 하며 타구장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또다시 낭보가 날아들었다. 후반 22분, 왼쪽을 충실히 공략한 성남의 김동희가 김동섭의 추가골을 도운 것. 하지만 눈앞에서 일어난 비극을 피하지는 못 했다. 거의 같은 시각 인천 문상윤의 슈팅이 전남의 골문을 통과했다. 현영민이 이천수와의 일대일 대결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며 아쉬움을 남겼고, 이어 나온 불안한 볼 처리를 문상윤의 오른발이 놓치지 않았다. 김병지는 얼른 골문으로 들어가 볼을 꺼냈다. 하나라도 더 넣어야 했다. 울산이 성남에 두 골 차로 뒤처져 있었다고는 해도, 이대로 패하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후 3시 29분] 죽지 않은 이호와 발버둥 친 하석주 감독

하 감독은 김영우를 투입한 뒤 현영민을 전진 배치해 체력 부담을 덜어줬다. 이 시기 전남은 팀의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뒷공간을 열어줬고, 이천수와 이보가 뛰어든 속도에 고전했다. 성남에서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 들어왔다. 이호가 앞발로 빠르게 밀어 찬 볼이 수비를 맞고 굴절되며 추격골로 이어진 것. 성남과 울산이 3-2를 이룬 동안, 동점부터 만들어야 했던 하 감독은 후반 31분 현영민 대신 코니를 투입해 '공중전'을 시작한다. 코니를 중앙 수비로 앉히고, 임종은을 원톱 스테보의 짝으로 맞췄다. 정상적인 빌드업을 포기한 채 경기 종료 15분 전부터 줄곧 볼을 띄우겠다는 심산. 꺼내 들 수 있는 카드는 모두 내보였다.

[오후 3시 35분] 진성욱의 잔인한 골, 두 점이나 뒤진 전남

하지만 하 감독의 수는 완전히 뒤틀린다. 후반 34분, 인천 진성욱이 코니가 노출한 실수를 놓치지 않고 김병지까지 따돌리며 추가골을 뽑아냈다. 교체돼 들어간 선수는 경기 시작 전, 하프타임 외에는 볼 없이 웜업을 해야 하기에 투입 직후의 첫 몇 분이 상당히 중요하다. 코니는 잔디를 밟은 이후 상대 압박이 닿지 않는 곳에서 롱패스를 몇 번 시도하기는 했으나, 빠르게 치고받는 경기 템포에는 익숙할 수가 없었다. 진성욱은 코니에게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전남의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잘라냈다. "상황을 봐서 진성욱의 투입도 고려하고 있습니다"라던 김봉길 감독의 수가 맞아떨어진 순간이었다.

[오후 3시 43분] 코니의 추격골 무색케 한 울산의 역전골

임종은에 이어 코니까지 올려보냈다. 사실상 스테보, 임종은, 코니로 공격진을 꾸린 전남은 하늘에서의 싸움에 더욱 열을 올렸다. 성과도 있었다. 후반 42분 김태호의 크로스가 코니의 머리에 정확히 배달되며 유현을 꼼짝 못 하게 했고, 3-2로 추격했다. 스테보는 얼른 골대 안으로 뛰어가 볼을 갖고 나왔다. 한 골만 더 따라가면 스플릿 싸움을 뒤집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을 터. 하지만 탄천종합운동장에서는 이미 울산이 양동현의 PK골과 박동혁의 추가골에 힘입어 경기를 3-4로 뒤집은 뒤였다. 11분 만에 세 골을 몰아넣었던 울산의 이야기를 들을 여유가 전남에는 없었다.


[오후 3시 50분] 코니의 극적인 동점골에도 위로가 필요했던 전남

기적을 만든 줄 알았다. 후반 49분, 또다시 골을 뽑아낸 코니는 서포터즈 앞으로 달려가 포효했다. 전남의 모든 선수가 함께 얼싸안으며 기쁨을 나누는 동안, 김병지는 벤치로 향했다. 울산의 결과를 재차 확인해야 했기 때문. 들뜬 얼굴로 다가온 김병지에게 노상래 수석코치가 언질을 줬고, 이내 얼어붙은 표정으로 돌아갔다. 경고 누적으로 결장했음에도 인천까지 와 함께했던 주장 방대종은 관중석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울산의 결과(3-4 승)를 접한 이후였다.

종료 휘슬이 울린 뒤 울산의 역전승 소식을 듣지 못한 몇몇 선수들은 두 팔 들어 환호했다. 이들의 낯빛이 좌절감으로 가득 차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극적인 무승부를 만들어냈다는 환희의 순간은 잔인하리만치 짧았고, 허탈함에 주저앉고 드러누웠다. 하 감독은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라운드로 들어가 선수들을 일일이 위로했다. 전남 벤치에서는 푸념 섞인 말도 튀어나왔다. "저쪽(울산)에는 또 PK 찍었대요".

[오후 4시 1분] 가라앉은 인터뷰실, 끝내 승천하지 못한 용

"(성남과 울산의 경기가) 0-1에서 갑자기 2-1로 역전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계산했던 대로 스리백 카드를 들까 하다가 실점을 당해서 어떻게 해보지도 못했고요. (그쪽은) 3-1로 벌어졌다고 했는데, 우리도 3-1로 벌어졌어요.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에 투입한 키 큰 선수들이 잘 맞았지만, 울산이 4-3으로 역전했다고 하더라고요. 성남이 실점을 잘 안 하는 팀인데도 그렇게 네 골이나 먹었더라고요."

"끝나고 들어가서 선수들 손 한 번 잡아주고 그랬죠. 저보다 선수들이 더 가슴 아프지 않겠어요. '최선을 다한 것에 고개 숙이지 말고, 다시 또 준비하자'고 얘기했어요. 모든 잘못은 제가 지고 갈 부분입니다. 선수들에게 미안하죠. (더 좋은 성적을 냄으로써) 선수들의 연봉을 많이 올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감독으로서 그 부분이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7월까지만 해도 줄곧 상위권에 머물렀다. 신구의 조화가 빚어낸 시너지 효과는 지난 2년간 강등권에서 허우적댔던 인고의 시간을 보상했고, 더 나아가 서울, 울산, 전북에 진 징크스의 빚을 청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남의 가을 축구는 이번에도 하위 스플릿에서 펼쳐진다. 3년 만에 노렸던 승천이 끝내 물거품이 된 경기, 현장은 더없이 무거웠다.<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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