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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답지 않은 작은 체구다. 웃을때 모습은 천상 소년이다.
툴롱컵 대회가 끝나고 느낌이 좋았다.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이번 청소년월드컵서 사고 한번 칠께요."
류승우는 사실 주전이 아니었다. 8년만의 우승컵을 차지한 아시아청소년대회(19세 이하)에서도 조연이었다. 대회 후 이를 악물었다. 이광종 감독의 눈에 띄기 위해 일찌감치 준비에 들어갔다.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문창진(포항) 김승준(숭실대)이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낙마했다. 월드컵에 가기 전 가벼운 부상으로 휴식을 취하며 몸상태를 끌어올렸다.
뜻밖의 부상, 함께 만든 세계 8강
최상의 컨디션이던 류승우는 나이지리아전에서 쓰러졌다. 제대로 발목을 접질렸다. 너무 아파서 발을 딛지도 못할 정도였다. 나머지 경기에 뛰지 못할 것이라는 직감이 왔다. 너무 속상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형제 같은 팀원이 있었다. 돌아가면서 밥도 퍼주고, 방에만 누워있는 류승우를 삼삼오오 찾아와 위로해줬다.
생각해보면 정말 가족같은 팀이었다고 했다. 김승준이 부상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됐을때도 그랬다. 아시아대회 때부터 고생한 김승준이 돌아갈때 모두 자기가 다친 것처럼 울며 안아줬단다. 이광훈(포항)의 생일때도 마찬가지였다. 콜롬비아와의 16강전을 앞두고 코칭스태프에 방해가 될까봐 선수들끼리 파티를 하려 했는데 이 감독이 선수단 집합을 시켰다. 혼날줄 알았는데 이 감독 손에는 생일케이크가 있었다. 이 감독은 "우리는 가족이다. 내가 아버지고 가족인데 너희들끼리만 파티를 하면 기분 좋겠냐"라며 함께 파티를 즐겼다. 콜롬비아전 승리는 이같은 끈끈함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했다.
이라크와의 8강전은 너무 아쉬운 경기였다. 경기 후 라커룸은 울음바다였다. 이 감독은 고개 숙이지 말고 당당히 나가자며 선수들을 위로했다. 선수들은 서로 자기가 잘못했다며 울었다. 류승우는 차라리 뛰는게 나았다고 했다. 선수들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미안한 마음에 의무팀의 일을 도왔다. 한국에 돌아오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출국길과 달리 귀국길에는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한-일월드컵이 바꾼 그의 인생
류승우는 '2002 키드'다. 한-일월드컵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유소년 클럽에서 취미로 볼을 차던 류승우는 합성초등학교에 스카우트됐다. 모든 선수들의 시작이 그랬듯이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는 허락했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합성초 감독이 매일 찾아왔지만, 어머니는 만남을 거부했다. 아버지가 중재에 나섰다. 한달만 시켜보자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선수 시작 후 한달도 되지 않아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어머니도 결국 축구선수 류승우를 인정했다.
재능을 인정받은 류승우는 부곡중학교로 진학했다. 처음 서울에 간 김해 소년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몸도 약해서 매일 매일이 고통이었다. 남수원중학교로 옮긴 후에야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장이 발목을 잡았다. 기술은 월등했다. 또래보다 작았던 류승우는 몸싸움에 약했다. 수원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무조건 먹기 시작했다. 토할때까지 먹었다. 먹는게 고통일 정도였다. 넉넉치 않은 형편에 미안함이 앞섰다. 그래서 운동에 더 목숨을 걸었다. 류승우는 이후 웨이트트레이닝을 한번도 거르지 않았다. 발목 부상, 근육 파열 등으로 고생했지만, 부모님 생각으로 버텼다.
'효자' 류승우는 이번 부상 치료비 때문에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했다. 그의 목표도 개인택시를 모는 아버지, 식당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집에서 편히 쉬는 것이다. 그 다음에야 진짜 목표를 말했다.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을 거쳐 유럽진출까지 하고 싶단다. 수줍지만 강단있는 이 청년이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