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멈춘 경기' 그라운드는 아름다웠다

박찬준 기자

기사입력 2013-03-06 16:11 | 최종수정 2013-03-07 15:01


축구는 전쟁이다.

2000년 말 뉴욕타임즈는 20세 최고의 발명품으로 축구를 꼽았다. 축구의 시작으로 전쟁이 줄었다는게 이유였다. 축구는 단순히 경기가 아니다. 국가, 지역, 이념을 뛰어넘은 대리전이다. 아무런 연관없는 외국인 선수들도 경기를 뛰는 순간 만큼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전사다. 그들에게 용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이유다. 얼마전까지 영웅이었던 선수도 다른 유니폼을 입으면 적이 된다. 축구는 치열하다.

맨유와 레알 마드리드는 유럽을 대표하는 명문이다. 매년 최고의 축구팀 자리를 두고 다툰다. 자존심 대결이 치열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6일(한국시각) 영국 맨체스터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두팀의 2012~2013시즌 유럽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은 조금 다른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맨유팬들은 4년만에 돌아온 '영웅'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큰 박수로 환영했다. 맨유 유니폼을 입은 꼬마 팬은 '호날두 다시 돌아와요. 하지만 오늘은 골을 넣지 마세요!'라는 애교 섞인 손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했다. 양 팀의 수장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과 조제 무리뉴 레알 마드리드 감독은 중요한 순간마다 얼굴을 붉히는 대신 따뜻하게 손을 잡았다.

그라운드 밖의 훈훈함과는 달리 경기는 치열했다. 1차전에서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던 양 팀은 8강 진출을 위해 사력을 다했다. 선제골은 맨유의 몫이었다. 후반 3분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가 자책골을 기록했다. 맨유가 기세를 올리고 있던 후반 11분 변수가 발생됐다. 나니가 알바로 아르벨로아와 볼을 다투는 과정에서 발을 높이 들다가 부딪쳐 퇴장당했다. 이 후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이어졌다. 퍼거슨 감독이 퇴장 선언 후 발끈하며 경기장으로 뛰어나가자, 무리뉴 감독이 퍼거슨 감독이 있는 테크니컬 에어리어쪽으로 다가가 귓속말을 나눴다. 이 장면은 중계카메라를 통해 그대로 잡혔다.

나니의 퇴장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숫적 우세를 점한 레알 마드리드가 맹공을 펼쳤다. 후반 14분 교체투입된 루카 모드리치가 절묘한 중거리 슈팅으로 동점골을 기록했다. 3분 뒤 드라마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호날두가 곤살로 이과인의 크로스를 넘어지며 밀어넣었다. 1차전에 이어 2차전에서도 골을 터트린 후 달려드는 팀 동료를 향해 골 세리머니를 자제시켰다. 오랜 팬들 앞에서 성장한 모습과 함께 가치를 입증했다. 노세리머니로 팬들에게 예를 표했다. 호날두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지금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팀 승리를 이끌어 기쁘기도 하지만 맨유가 탈락하게 된 게 슬프다"는 소감을 밝혔다.

언제나 당당한 무리뉴 감독도 맨유를 깍듯이 예우했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최고의 팀이 졌다. 우리는 이길 자격이 없지만, 축구는 이런 것"이라며 "11대11로 계속 싸웠다면 이길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는 겸손한 소감을 밝혔다. 패한 퍼거슨 감독은 "정신이 혼미하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기자회견장에는 등장하지 않았다. 상심에 대한 표시였을뿐 둘은 언제나 처럼 경기 후 같이 와인을 즐겼을 것이다. 두 감독은 늘 그래왔다. 무리뉴 감독이 경기 전 "세상이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멈출 것"이라고 말했던 맨유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는 치열함보다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며 막을 내렸다.


박찬준 기자 vanbaste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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