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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채 풀리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빠르게 페널티 에어리어 내 왼쪽에서 볼을 잡은 미하엘 크론델리와 눈이 맞았다. 곧바로 올라온 크로스는 속도가 빨랐다. 머리를 갖다대기에는 늦은 타이밍이었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힘차게 오른발을 뻗었다. 예상치 못한 슛에 골키퍼가 손을 뻗었지만, 볼은 그대로 골망을 출렁였다.
박주영에겐 감회가 남다른 득점이다. 공식 리그전에서 득점한 것이 334일, 약 11개월 전이다. 아스널 시절이던 지난해 10월 26일 볼턴과의 칼링컵 16강전에서 터뜨린 결승골 이후 11개월은 악몽이었다.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지난 시즌 말미에는 2군(리저브팀)에 내려가 스카우트 앞에서 연습경기를 뛰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태극호의 캡틴이라는 자존심에 생채기가 났다. 하지만 스페인 진출 두 경기 만에 터진 득점포로 설움을 시원하게 날렸다.
공교롭게도 두 리그에서 비슷한 역사를 썼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와 프리메라리가 모두 데뷔 후 두 번째 경기에서 득점포를 가동했다. 다소 차이는 있다. 볼턴전은 데뷔전이었던 9월 20일 슈르스버리전 이후 한 달이 넘게 기회를 잡지 못한 끝에 나선 두 번째 경기였다. 리그가 아닌 리그컵으로 무게감도 다소 떨어졌다. 이 두 경기를 거치며 득점포가 터지기까지 127분의 시간이 소요됐다. 스페인에서는 발렌시아전에서 후반 26분 교체출전해 20분을 소화한 뒤, 헤타페전 교체출전 2분 만에 득점에 성공했다. 한 달과 1주일, 127분과 22분이라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힘보다는 기술, 박주영은 '스페인 스타일'
사실 박주영의 이른 활약을 기대한 이는 많지 않았다. 8월 말 셀타비고에 합류했으나, 곧 최강희호의 2014년 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A조 3차전 일정이 겹치면서 팀 훈련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파코 에레라 감독이 "박주영에 좀 더 적응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며 아까워 할 만했다. 우즈벡전을 마치고 복귀한 박주영은 발렌시아 원정에서 후반 교체로 감각을 조율했다. 이전보다 적극적인 몸놀림을 선보이기는 했으나 빠른 템포와 패스를 따라잡기 위해 한 박자 빠른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숙제도 얻었다. 하지만 헤타페전에서 박주영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팀 승리의 주역이 됐다.
프리메라리가는 EPL보다는 프랑스 리그1 스타일에 가깝다. 리그1은 평균 이상의 개인기를 갖춘 아프리카 선수들이 진을 치고 있다. 개인기와 스피드가 없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골키퍼를 제외한 필드플레이어 10명 모두 수준급 개인기를 갖추고 있는 프리메라리가 팀들은 기본적인 전술 외에도 개인역량에 중점을 두고 빠른 패스와 순간 패스로 승부를 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AS모나코 시절 비슷한 패턴을 이미 경험한데다 파워보다는 정교함에 초점을 맞추는 박주영에겐 더할 나위가 없는 무대다. 이번 데뷔골로 박주영은 아스널을 떠나 승격팀 셀타비고로 향하고자 했던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모나코의 추억, 비고에서 재현될까
박주영의 미래는 '장밋빛'이다. 에레라 감독의 믿음이 같하다. 빠듯한 팀 살림살이를 쪼개 아스널에 100만유로(약 14억원)의 임대료를 제시하면서까지 박주영을 보내달라고 요청할 만큼 큰 기대감을 안고 있었다. 헤타페전을 마친 뒤에도 "골을 넣는 것, 이것이 바로 박주영을 데려온 이유"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팀 내 여건은 충분히 비집고 들어갈 만한 틈이 있다. 셀타비고는 올 시즌 이아고 아스파스와 미하엘 크론델리라는 두 공격수에 의존해왔다. 올 시즌 스페인 무대를 밟은 크론델리는 활동폭이 넓지만 스피드와 골 결정력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지난 시즌 세군다리가(2부리그)에서 23골을 터뜨리며 승격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아스파스는 상대 집중견제 속에 활로를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대안으로 평가받는 마리오 베르메호와 엔리케 루카스는 경쟁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에레라 감독 입장에선 아스파스에 집중된 공격력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폭넓은 활동량과 골 결정력을 두루 증명한 박주영은 향후 셀타비고 공격의 중심축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시즌 로빈 판페르시(현 맨유)의 후광에 가렸던 것과 아르센 벵거 감독의 외면 등으로 점철된 아스널과는 천지차이다.
마지막 숙제였던 자신감 문제도 시원하게 풀었다. 득점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함과 동시에 스페인 무대 적응에 대한 부담감을 떨쳐냈다. AS모나코 시절처럼 팀 공격의 주축으로 거듭날 수 있는 발판이 만들어 졌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