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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축구 선수는 녹색 잔딧물이 든 유니폼을 입고, 코를 톡 쏘는 파스 냄새를 풍기며 그라운드에서 숨을 헐떡일 때가 가장 '축구 선수다운' 법이다. 지난 7년간 맨유맨으로서 본분을 다한 박지성은 올 시즌을 앞둔 지난 여름 선택의 갈림길에 섰고, 결국 퀸즈 파크 레인저스(이하 QPR)에서의 새로운 도전을 택하며 상당한 관심을 불러 모았다.
처음으로 맨유 유니폼을 입었던 05-06 시즌 당시, 박지성은 게리 네빌, 에브라, 에인세, 호날두, 루니, 반니스텔루이, 스미스, 비디치, 스콜스, 존 오셔, 플레쳐, 피케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12-13 시즌 QPR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박지성은 그린, 트라오레, 안톤 퍼디난드, 시세, 타랍, 숀 라이트-필립스, 넬슨, 파비우, 호일렛 등을 이끌고 주장 완장을 찼다.
맨유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클럽이었다. 박지성이 몸담은 7년 동안에도 EPL 우승컵을 무려 네 번이나 들어 올렸고, 2008년엔 챔피언스리그와 클럽월드컵의 왕좌에까지 올랐다. 반면, QPR은 챔스는커녕 승격 시즌이었던 지난해 17위를 기록하며 가까스로 EPL 잔류에 성공했다. 올 시즌 들어 토니 페르난데스 구단주의 폭발적인 투자로 이름값 있는 선수들을 여럿 불러들이며 반전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선수 영입이 성적 향상의 보증 수표로 직결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은 만큼, 올 시즌도 끝까지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맨유와 QPR의 차이를 짚어본 이유? 그만큼 박지성의 위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동안 맨유의 박지성이란 느낌이 강했다면, 이젠 박지성의 QPR이다. 4-4-2 시스템을 내세운 팀 전술에서 디아키테와 함께 중앙 미드필더로 배치된 박지성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공-수 모두 적극 관여해야 할 위치에 선 박지성의 주 임무는 투톱의 공격을 보조하는 것. 사실상 처진 스트라이커 격인 타랍과 비슷한 선상에서 움직이곤 했다. 또, 프리롤로 측면과 후방으로 빠진 타랍의 빈자리를 메우며 시세와 함께 최전방 투톱의 위치에 서는 시간도 많았다. 이젠 더 이상 '소리 없는 영웅' 역할이 아니었다. 공격을 전개하는 QPR의 패스는 상당수 박지성을 거쳐 흘러갔기에 적절한 볼 배급이 뒤따라야만 했고, 최전방에서 볼을 잡았을 땐 직접 돌파나 마무리 슈팅의 능력도 보여줘야 했다. 이른바 박지성에게 'unsung hero'에서 'un'을 뗀 플레이를 기대한 것이다.
언뜻 보기엔 수비적인 역할이 준 것 같기도 하지만, 박지성이 공격적으로만 위치했을 때 QPR의 상황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각해졌다. 디아키테가 수비적인 맥을 굉장히 잘 짚고, 상대의 웬만한 공격을 완벽에 가깝게 잘라내는 수비형 미드필더 몫을 해주지 못하는 이상, QPR의 플랫 4는 상대 공격수에 직접 노출되는 경우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후반 7분 미추에 내준 두 번째 골이 그런 경우, 공격을 하다가도 수비적인 임무를 분담해 주어야만 QPR의 실점이 줄어들 수 있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공격도 하고, 수비도 하고, 이게 바로 QPR 에이스 박지성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캡틴' 박지성에게 따로 주어진 임무?
앞서 말했듯, 지난 시즌 28승 5무 5패를 기록한 맨유와 10승 7무 21패를 기록한 QPR의 차이는 엄청나다. 어쩌면 손쉽게 5-0으로 이기던 팀에서 허탈하게 5-0으로 지는 팀의 일원이 된 셈이다. 70%가 넘었던 맨유의 승률과는 달리 QPR의 승률은 고작 26%에 그치고 만다. 이런 팀에서 주장을 맡았다는 것, 맨유에선 그라운드에 나서 본인의 역할만 충실히 해내면 됐지만, QPR에선 팀 분위기를 고려해 팀원 전체를 이끌어가야 할 중책을 맡게 됐다는 소리다.
올 시즌을 앞두고 굵직한 선수들을 불러들였던 QPR이 성적을 내느냐 못 내느냐의 가장 큰 관건은 '조직력'이다. 무작정 선수만 사다 모으면 되는 게임과는 달리, 흩어져있는 선수들 개개인에 팀워크라는 연결 다리를 놓아 쫄깃쫄깃한 팀으로 변화시키는 데엔 생갭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QPR의 홈 개막전 역시 그런 우려가 그대로 드러난 경기였다. 선수들의 능력치는 몰라도, 팀으로서의 전체적인 구심점이 너무나도 약해 이리저리 흔들리기 일쑤였다. 프리시즌에서 발을 맞춰봤다고는 하나 아직 미완의 느낌이 강했기에, 박지성의 어깨는 훨씬 더 무거워졌을 것이다. 승리보다 패배에 익숙했던 팀 분위기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 QPR의 운명은 캡틴 박지성에게 달려있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