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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조지영 기자] 고자극 도파민으로 가득 찬 숏폼 세상에 우민호(53) 감독은 뚝심으로 갈고 닦은 정통을 추구했다. 미련하리만큼 요령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한 연유로 성난 근육을 자랑하는 액션 스타, 흥행을 위한 신파도 모두 배제했다. 온몸으로 뿜어내는 처연함과 외로움의 안중근만 존재하면 됐다. 이 영화는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클래식은 영원하니까.
대한민국 정계·검찰·언론의 어두운 이면을 드러냈던 '내부자들'(2015), 1979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룬 '남산의 부장들'(2020) 등 권력과 욕망을 다룬 '피카레스크(주역들이 도덕적 결함을 갖춘 악인 소재의 작품) 영화의 장인'으로 불리는 우민호 감독의 신작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읽어내는 선지적 연출가라는 호평을 받은 그는 매 작품 한 시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예리한 연출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작품에 투영해 왔다. 이번 '하얼빈'에선 처음으로 선의를 가진 인물 안중근을 집중 조명했다. 그동안 하얼빈 의거를 다룬 작품 중 가장 리얼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모습을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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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가 과감한 선택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오락 요소가 담긴 블록버스터 공식을 따른다고 흥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한국 영화가 위기를 맞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블록버스터가 틀렸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블록버스터를 좋아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 장르 영화로 찍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진심을 다해 이 영화를 만든다면 관객도 분명 진심을 알아줄 것 같다. 실제로 화려한 액션도 무술 감독이 짜왔지만 내가 현장에서 전부 바꿨다. 함경북도 신아산 전투 장면을 촬영할 때였다. 광주에서 로케이션이 진행됐는데 하필 촬영 당일 50년 만에 폭설이 왔다. 원래 '하얼빈' 배경 자체가 눈 설정이 없었는데 촬영할 때마다 눈이 왔다.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았고 그런 부분을 살려 조금 다른 결의 액션과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 감독의 확고한 소신대로 '하얼빈'은 기존 안중근 영화와 결이 다르다. 전투 신을 폭발력 있게 그리기보다 그 처참함에 초점을 맞췄다. 이름 모를 독립군들이 진흙탕에 묻혀 살육되고 적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는 아비규환에 시선을 맞췄다. 조각 같은 배우들의 클로즈업을 욕심내지 않았고 어둠과 그림자로 고뇌를 시각화했다. 긴박함을 증폭하기 위한 빠른 컷 편집도 없다. '하얼빈'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들을 향한 안중근의 부채감을 감싸안았고 죄의식에 괴로워했던 남아있는 영웅들의 심경을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더욱이 '안중근 영화'에서 늘 보았던 '신파'가 없다. 우 감독은 "'하얼빈'은 확실히 요즘 영화는 아니다. 요즘은 숏폼이 대세이기도 하고 빠른 걸 좋아하지 않나? 그게 잘못됐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시대에 뭔가 영화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고 그래서 이 영화를 어떤 작품보다 클래식하게 찍고 싶었다. 관객이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란 자신이 있었다. 원래부터 나는 신파를 안 좋아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그들(독립군)의 마음을 신파로 풀고 싶지 않았다. 단단하고 힘 있게, 숭고하게 풀고 싶었다. 신파가 모두 나쁜 게 아니지만 요즘은 이상하게 쉽게 희화화되는 것 같다. 그런 부분이 조심스러웠다. '하얼빈'에 참여한 배우들에게도 들리지 않지만 보이는 톤으로 연기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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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새로운 얼굴이 된 현빈을 캐스팅한 과정도 지독한 우 감독의 뚝심이 발동됐다. 우 감독은 "우리가 아는 영웅 안중근과 다른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실패한 패장이 하얼빈까지 가는 여정이 얼마나 고단하고 고뇌에 차 있을까 싶었다. 슈퍼맨도 아니지 않나. 가족들은 조국에 남겨져 있고 내가 또 실패한다면 많은 동지가 죽을 수 있는 위기였다. 그런 눈빛이 현빈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부드럽기도 하고 때로는 처연하기도 하다.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굉장히 강한 힘도 느껴지는 결기가 보인다. 그런 모습이 현빈에게 보여 캐스팅을 강력히 원했다"며 "현빈이 여러 번 고사했다. 그래도 나는 될 때까지 하려고 했다. 만약 현빈이 이 작품을 끝내 고사했다면 이 영화를 안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영화를 촬영하다가도 다시 이 영화로 돌아와 또 출연 제안을 했을 것이다. 1년 뒤 제안하고 10년 뒤에도 제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10년 뒤면 좀 힘들긴 했겠다. 30세 안중근을 50세 현빈이 연기하긴 또 쉽지 않겠다"고 웃었다.
그는 "우리 배우들이 혼신을 다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들 몸을 아끼지 않더라. 눈밭에서 뒹굴고 진흙밭에서 뒹굴면 그 눈덩이와 진흙이 속옷까지 들어간다. 그걸 다 버티며 촬영했다. 현빈은 대역을 해도 되는데 자신이 나오는 장면은 무조건 직접 연기 하겠다고 하더라. 흔히 뒤통수, 발만 나올 때는 대역을 쓰기도 하는데 현빈은 그렇지 않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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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그 내레이션을 쓸 때는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것인지, 아니면 어떤 위기감을 느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한 번의 성공(하얼빈 의거)으로 독립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안중근 장군도 당연히 알았고 그의 말처럼 1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될 때까지 해야 하는 정신이 필요했다, 실제로도 35년 뒤에 독립을 이루지 않았나? 독립을 이루는 과정에서 미국의 힘도, 2차 세계대전도 있었지만 나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중요한 것은 독립 투사들이 그때까지 계속 싸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게 우리의 진정한 승리라고 본다. 내 영화에서 그런 지점을 강조하고 싶어 내레이션에 힘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배우들과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이 영화는 잘 찍어도 못 찍어도 삼일절, 광복절 때 TV로 전 국민이 볼 수 있는 영화다'고. '그러니 정말 우리 잘 찍자'고 말했다. 내가 못 찍었던 영화를 내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감독으로서 정말 큰 고통이다. 나도 그렇게 느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감독으로서 아픈 영화가 안 되고 잘 만든 영화로 남겨지길 바랐다. 안중근 장군이 이 영화를 볼 수 없지만 그에게 누가 되지 않을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또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모든 독립군에 누가 안 되길 바란다. 대중에게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영화가 되길 바란다. 사람들이 힘들 때 다시 끄집어내서 보고 위로를 느끼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고 진심을 전했다.
'하얼빈'은 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박훈, 유재명, 그리고 이동욱 등이 출연했고 '내부자들' '남산의 부장들'의 우민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오는 24일 개봉한다.
조지영 기자 soulhn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