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보다 더 무서운 '방송국 놈들'…영화 '악마와의 토크쇼'
기사입력 2024-05-0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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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오보람 기자 = 과거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일컫던 때가 있었다.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집집이 컬러텔레비전을 들이면서 사람들은 말초적인 정보에 끊임없이 노출됐다. 전쟁과 범죄, 폭력, 섹스, 마약 등을 담은 영상은 말 그대로 안방까지 침범했다.
방송국들은 웬만한 콘텐츠로는 무감해진 시청자를 사로잡기 어려워지자 일제히 더욱 자극적인 콘텐츠를 내놨다. 더 엽기적이고, 더 폭력적이고, 더 논란이 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캐머런·콜린 케언스 감독이 함께 갱을 쓰고 연출한 '악마와의 토크쇼'는 이 같은 경쟁이 극에 달하던 1970년대 후반 미국 방송가를 배경으로 한 공포 영화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활용해 대형 방송사고가 난 실제 토크쇼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주인공은 어렵사리 심야 토크쇼 MC가 된 남자 잭(데이비드 다스트말치안 분)이다.
그는 몇 년간 프로그램을 이끌며 스타가 되지만, 경쟁 프로그램에 턱없이 밀리는 시청률 때문에 늘 열등감에 젖어 있다. 새를 잡아먹는다는 거대 거미를 동원하고, 출연자에게 욕하며 싸워도 보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를 출연시켜도 도통 반등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핼러윈을 앞두고 시청자들의 눈길을 단박에 끌 수 있는 아이템을 생각해낸다. 유명한 영매들을 불러 생방송으로 빙의 등 초자연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은 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남자, 내면에 악마를 품고 사는 소녀, 그를 돌보는 박사, 유령을 믿지 않는 전직 마술사 등이 그렇게 한자리에 모인다.
'짜고 치는 고스톱'일 거라 여긴 잭의 예상과는 달리 촬영장에선 기이한 일이 잇달아 벌어진다. 귀신의 속삭임을 듣던 남자는 검은 피를 토하며 병원에 실려 가고 방청객은 최면에 빠져 공포에 질린다.
토크쇼 후반부 악령에 사로잡힌 소녀가 무대에 오르면서 방청객들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엑소시스트'(1973) 속 소녀와 흡사하게 돌변한 그의 모습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는 귀신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중계를 멈추지 않는 '방송국 놈들'이 더 무섭게 다가올 듯하다.
"최소 40주는 프로그램이 연장될 것"이라는 경영진의 말에 잭이 축배를 드는 장면은 특히 소름 끼친다. 방송 도중 사람이 다치고 구역질 나는 장면이 여과 없이 송출돼도 카메라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잠시 광고 보고 오시죠"라는 말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미디어의 장삿속과 텔레비전 중독 사회를 풍자한 작품이지만, 2024년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가슴도 뜨끔하게 만든다.
텔레비전에서 스마트폰으로 도구가 바뀌었을 뿐 자극적인 콘텐츠에 대한 갈망은 오히려 더 커졌다. 이젠 방송국 한두군데가 아니라 수천만 명이 유튜브나 틱톡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콘텐츠를 쏟아내 도파민을 자극한다.
이런 점에서 10대들의 '빙의 챌린지'를 소재로 한 공포 영화 '톡 투 미'(2023)가 연상되기도 한다. 극 중 소셜미디어에 빠진 청소년들은 '악마와의 토크쇼' 속 어른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토크쇼 장면은 화질이 뿌옇고 시각특수효과(VFX)도 허접하지만, 그래서 더 그 시절 프로그램 같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연출인지도 모호하게 만들어 긴장감을 놓기 어렵게 한다. 광고 시간 동안 긴박하게 돌아가는 촬영장의 모습까지 더해져 몰입감 역시 높다.
다스트말치안은 실제 토크쇼 진행자처럼 능수능란한 연기를 선보인다. 1970년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흔히 만날 수 있었던 진행자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카메라 앞에선 애처가인 척하면서도 뒤에선 탐욕으로 똘똘 뭉친 인간의 양면성도 훌륭하게 표현했다. '프리즈너스'(2013),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듄'(2021) 등 드니 빌뇌브 감독의 작품에 조연으로 자주 등장했던 그는 '악마와의 토크쇼'에서 주연으로 손색없는 연기력을 뽐낸다.
8일 개봉. 93분. 15세 이상 관람가.
rambo@yna.co.kr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