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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원류를 찾아서(마지막회). 서양 RPG의 구원자, 엘더스크롤

이덕규 기자

기사입력 2015-02-04 14:24


일본식 RPG 제국의 황금기

잠시 1997년으로 돌아가보자. 스퀘어의 '파이널판타지7'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적극적인 3D 기술 사용과 풍부한 동영상의 도입은 전 세계 게이머에게 충격을 주었다. '파이널판타지7'의 흥행으로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은 경쟁자인 세가의 세가 새턴을 누르고 콘솔 게임기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
일본식 RPG는 더욱 세를 불려갔다. 1998년에는 닌텐도의 '젤다의 전설: 시간의 오카리나'가 출시되었다. 3D 액션 게임과 RPG, 퍼즐이 혼합된 놀라운 게임이었다. '시간의 오카리나'는 패미통, 게임스팟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각종 게임언론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흥행에도 성공해 전 세계적으로 760만장 이상을 판매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게임은 플레이스테이션에 밀려 고전하던 닌텐도64를 북미 시장에서 2천만대 이상 판매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이 시기는 매 해 일본식 RPG가 흥행하던 시기였다. 1996년 등장한 닌텐도의 '포켓몬스터'는 '포켓몬 신드롬'을 만들어낼 정도로 흥행했다. 1999년 출시된 '포켓몬스터 금/은'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2천만장 이상을 판매했다. '포켓몬스터' 때문에 휴대용 게임기인 '게임보이'의 물량이 부족해져 소비자의 항의를 받을 정도였다.


파이널판타지8. 일본식 RPG의 전성기때 나왔던 게임
에닉스, 팔콤, 스퀘어 등 유명 개발사도 매년 굵직한 RPG를 뽑아냈다. 특히 스퀘어의 활약이 돋보였다. '제노기어스'(1998), '파이널판타지8'(1999)', '크로노 크로스'(1999), '패러사이트 이브2'(1999) 등 RPG를 매 년 여러 개 내놓았다. 이들 게임은 타이틀마다 차이가 있지만 백 만장 이상은 가볍게 판매하며 흥행했다. '파이널판타지8'는 800만장 이상 팔려나갔다.

이 흐름은 플레이스테이션2에도 이어졌다. 2001년 스퀘어의 '파이널판타지X'와 2003년 '파이널판타지X-2'는 세계적인 호평을 받으며 성공을 거뒀다. '파이널판타지X'는 전 세계적으로 800만장 이상이 팔리며 플레이스테이션2 흥행에 기여했다. '파이널판타지7'부터 이어져 온 화려한 3D 컷씬과 동영상은 스퀘어가 내놓는 RPG의 상징이 되었다.

차세대 게임기 전쟁과 새로운 RPG의 흥행

2000년대 초반까지 일본식 RPG는 거칠 게 없었다. 콘솔 하면 일본식 RPG였고, 어지간한 RPG라면 수 십 만장의 판매량은 기본으로 보장되던 시절이었다. 반면 PC 플랫폼에 묶여 고전하고 있던 서양식 RPG는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 정도를 제외하면 완전히 몰락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게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 당시 일본식 RPG의 성공은 콘솔 게임기, 특히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는 경쟁자를 모두 꺾고 콘솔 게임기 시장에서 절대적 강자로 군림했다. 게임업계의 고참이던 세가와 닌텐도 모두 가정용 게임기 시장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 시리즈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한편 '플레이스테이션2'에 도전한 게임기 중 마이크로소프트의 'Xbox'가 있었다. Xbox는 결국 플레이스테이션2에 패배했다. 마이크소프트는 절치부심했다. 2005년 차세대 게임기인 'Xbox360'을 내놓았다. 경쟁 기종인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3'보다 1년 먼저 나온 Xbox360은 북미와 유럽을 공략하며 차세대 게임기 돌풍을 일으켰다.


서양식 RPG의 부활을 알린 엘더스크롤: 오빌리비언. 차기작인 스카이림은 수천만장 이상 팔리며 최고의 흥행을 달성했다
문제는 Xbox360에 맞는 RPG가 필요했다. 베데스다는 '엘더스크롤4: 오블리비언'(2006)을 Xbox360용으로 내놓았다. 게임은 1년만에 3백만장을 팔며 대박을 쳤다. 오블리비언은 Xbox360의 성능을 이용해 엘더스크롤 시리즈 특유의 거대한 스케일을 유감없이 구현했다. 북미-유럽 시장에 딱 맞는 분위기의 서양식 RPG이기도 했다.

'발더스 게이트' 시리즈로 RPG 명가가 된 바이오웨어도 콘솔 게임 제작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바이오웨어는 이미 2003년 Xbox용 3D액션 RPG '스타워즈: 구공화국의 기사단'으로 그 해 게임상을 휩쓴 적이 있었다. Xbox 플랫폼이 고전하는 와중에도 구공화국의 기사단은 백 만장 이상을 판매했다.

바이오웨어는 '매스 이펙트'(2007)를 Xbox360 독점작으로 내놓았다. '정통' RPG에서 벗어난 TPS와 RPG가 결합된 형태의 게임이었다. 팬들 사이에선 '매스 이펙트'의 장르논란이 벌어졌다. 한쪽은 '액션게임이다', 한쪽은 'RPG다'로 나뉘어 논란을 야기했다. 어쨌든 우주를 배경으로 한 매스이펙트의 방대한 설정에 많은 게이머가 열광했다. 다시 한 번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서양 RPG의 저력을 과시했다.

제국에 드리우는 석양

서양 RPG들이 흥행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 일본 RPG는 점점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Xbox360과 플레이스테이션3이라는 차세대 콘솔 게임기가 등장했지만 일본 내 보급은 부진했다. 차세대 게임기에 어울리는 화려한 그래픽 기술은 상당한 비용 부담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개발사들이 여전히 잘 팔리는 플레이스테이션2에 매달리고 있었다.

스퀘어 에닉스의 '파이널 판타지12'처럼 플레이스테이션2의 성능을 극한으로 뽑아내는 게임도 있었지만 결국 최신기술을 사용한 '오블리비언'이나 '매스 이펙트'의 그래픽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스타오션4'처럼 차세대 기종 나온 게임도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단순한 구조의 일직선 진행을 컷씬과 캐릭터로 때우려는 일본식 RPG의 매너리즘에 게이머들은 점점 질리기 시작했다.


테일즈 오브 베스페리아, Xbox360으로 출시된 일본 RPG
그나마 반다이 남코가 차세대 게임기 전쟁 초기부터 여러 RPG를 내놓았다. 반다이 남코는 2007년 '트러스티 벨: 쇼팽의 꿈'과 2008년 '테일즈 오브 베스페리아'를 Xbox360 기종으로 내놓았다. '트러스티 벨'은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몽환적인 이야기와 뛰어난 그래픽으로 주목 받았다. '테일즈 오브 베스페리아' 역시 Xbox360의 성능을 살린 뛰어난 그래픽과 준수한 스토리로 호평을 받았다. 베스페리아는 Xbox360이 유달리 고전하던 일본 시장에서 20만장 이상을 판매하며 체면치레를 했다.

하지만 일본식 RPG 자체가 점점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매스 이펙트'나 '폴아웃3' 같은 서양식 RPG가 일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꽤 흥행한 반면, 일본식 RPG는 점점 일본 내에서만 소비되는 양상으로 변해갔다. 스퀘어 에닉스의 '파이널판타지' 시리즈는 여전히 잘 팔렸지만 그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본 내에서의 판매량 비중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MMORPG의 시대

많은 게임 개발사가 콘솔 게임으로 이목을 집중한 사이, PC 플랫폼에서는 새로운 RPG 장르가 제국을 세우고 있었다. MMORPG다. 다른 게이머와 게임 내에서 함께 모험을 즐기고 교류할 수 있다는 점은 콘솔 게임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MMORPG만의 강점이었다.

기반은 이미 다져져 있었다. '울티마 온라인'의 흥행으로 MMORPG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다. '에버퀘스트'는 3D MMORPG의 가능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MMORPG 장르를 확립했다. 마침내 초고속 인터넷망이 전 세계적으로 등장한 21세기가 되자 MMORPG는 본격적인 성장을 시작했다.

2001년 등장한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은 '국가전'이라는 독특한 컨셉으로 인기를 끌었다. 3D MMORPG의 강자였던 '에버퀘스트'가 PvE를 위주로 하고 PvP에 대해선 엄격했던 반면, '다크 에이지 오브 카멜롯'은 국가간 대결(RvR)을 주 컨텐츠로 내세웠다. DAoC에서는 전장에서 직업마다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협동이 중요했고, 이는 타 게이머와의 교류라는 MMORPG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졌다.


MMORPG의 전설이 된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천만명 이상의 접속자수를 기록했다
2004년, MMORPG의 전설이 될 게임이 등장한다. 블리자드의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다. 처음에는 PC게임, 그것도 RTS를 주로 만들던 블리자드가 MMORPG를 만든다는 소식에 다들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상상 이상이었다. 게이머는 얼라이언스와 호드 중 한 진영에 속해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직접 탐험하며 스토리를 체험하고, 최고 레벨에 도달하면 보스 레이드와 RvR을 즐길 수 있게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등록 계정 1억개 이상, 실제 게임을 즐기는 접속자수만 천 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게임으로 성장했다. 10년이 넘은 2015년 현재까지 전 세계 MMORPG 중 압도적인 매출 1위를 자랑하고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성공으로 MMORPG 장르는 더욱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초고속 인터넷이 유달리 빠르게 보급된 한국에서 MMORPG는 일찍부터 전성기를 맞았다. '리니지', '라그나로크 온라인', '리니지2', '마비노기' 등 다양한 MMORPG가 쏟아져 나오며 온라인 게임 시장을 이끌었다. 성격 급하고 경쟁 좋아하는 한국 게이머의 입맛에 MMORPG는 '딱 맞는' 컨텐츠였고 온라인 게임 시장의 대부분을 MMORPG가 점유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미래를 향해서

2000년대 중반 이후 흥행한 RPG는 '전통'을 고수하기보다는, 다른 장르와 적절히 배합한 스타일의 게임이 많다. 좀 더 빠르고 경쾌한 전투를 도입하거나, TPS나 FPS같은 슈팅 게임의 특성을 배합하기도 한다. 반대로 다른 장르의 게임이 RPG 요소를 도입해 흥행하는 경우도 있다. GSC게임의 '스토커' 시리즈 같은 경우에는 정확히 어떤 장르인지 구분이 애매할 정도로 여러 장르의 요소가 섞여 있다.

'서양식 RPG'와 '일본식 RPG'의 구분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서양식 RPG의 경우도 콘솔로 출시되는 게임의 비중이 높아지며 콘솔 플랫폼에 알맞게 게임이 변형되고 있다. 간편한 조작이나, 단순화 된 대화 방식이 그렇다.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와 '매스 이펙트'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느껴진다.

일본식 RPG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일본식 RPG라고 해서 무조건 단순한 일자 진행을 고집하진 않는다. '래디안트 히스토리아'(2010)처럼 시간이동을 통해 역사를 바꾸고 다양한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방식의 진행이나, '택틱스 오우거: 운명의 수레바퀴'(2010)처럼 중요한 순간을 다시 선택해 다른 스토리를 볼 수 있는 방식의 진행 등 다양한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게이머도 예전처럼 '나는 서양식/일본식 RPG가 좋아서 이것만 고집한다'라는 식으로 게임을 즐기지 않는다. 어차피 대부분의 RPG가 다양한 요소를 섞어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회사들도 전통을 고집하거나 극소수 골수 마니아를 위한 게임보다는 더 많은 게이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대중적인 게임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스타워즈: 구공화국 온라인. 흥행에 실패하면서 게임사 CEO까지 교체됐다
[rpg006.png: 스타워즈: 구공화국 온라인]

MMORPG는 최근 주춤한 상태다. MMORPG의 엄청난 제작비는 흥행에 실패할 경우 회사마저 뒤흔들 수 있는 반작용을 낳았다. EA가 거액을 들여 개발한 MMORPG '스타워즈: 구공화국'(2011)이 예상했던 만큼 흥행하지 못해 CEO까지 사임해야 했던 예가 그렇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아성을 깰 MMORPG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흑백 모니터와 조악한 텍스트에서 시작했던 RPG는 3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화려한 3D 그래픽과 어지간한 소설 못지 않은 풍부한 이야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장르로 발전했다. 모험과 이야기를 사랑하는 게이머가 있는 한 RPG는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김경래 게임어바웃 기자 www.gameabou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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