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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모범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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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우가 연기한 우왕은 한 마디로 '비운의 왕'이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뒤 이인임의 힘을 빌어 10세에 즉위했다. 처음엔 학문을 닦는 등 바른 몸가짐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명덕태후 사망 이후 국사를 돌보지 않고 음주가무와 도색에 빠져 원성을 얻었다. 이인임이 최영-이성계 세력에 힘을 잃고 유배되자 정치적 기반을 잃었고 결국 1388년 "왕족의 혈통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성계의 주장으로 폐위돼 강화에 유배됐다. 일생을 혈통 컴플렉스에 시달리던 그는 1389년 아들 창왕과 함께 이성계에게 살해됐다.
30대 초반 젊은 남자배우가 연기하기엔 묵직한 캐릭터다. 박진우는 "나한테는 시험의 무대였다. 처음엔 정말 겁을 많이 먹었다. 연기해본 느낌의 캐릭터도 아니었고 내 이미지랑도 안 맞았다. 어설프게 건드렸다가는 욕 먹기 딱 좋은 역이라 겁먹고 시작했는데 모두 잘해주시고 칭찬해주시다 보니 재밌고 즐기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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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어린 눈빛, 울분에 가득찬 목소리, 정확한 발음 등 모든 면에서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가장 임팩트 있었던 건 죽기 전, '왕가의 혈통이라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자신의 몸을 인두로 지지는 장면이다. 화상 자국을 '용의 비늘'이라 우기며 절규하는 우왕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젊은 배우가 저런 연기를 할 수 있다니 놀랐다', '박진우의 재발견'이라는 등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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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촬영 에피소드도 전했다. 그는 "마지막 촬영 때 기분이 좋았다. 스태프가 하차할 때 꽃다발도 주고 했다. 사실 그 전에 귀양가는 날 마지막 촬영인 줄 알았다. 촬영이 끝났는데 이지란 선배님이 한시간 동안이나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고생했다고 악수해주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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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인 영화 '어린신부'에서 문근영의 첫사랑 야구선수를 연기했을 때도, MBC 시트콤 '논스톱5' 속 거절 못하는 대학생을 연기했을 때도 박진우는 반듯한 이미지와 조각같은 외모를 지닌 '모범생'에 가까웠다. 그는 "20세 때 '어린신부' 출연 당시의 얼굴이 지금도 보인다. 변하는 게 없다는 건 배우로서 안 늙었다는 뜻니까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캐릭터가 한정적일 수 있다. 남자다운 역할도 해야 하는데 어려보이고 착해보이고 이러니까 들어오는 캐릭터에 한계가 좀 있다. 그게 약간 단점"이라고 분석했다.
그런 면에서 '정도전'은 터닝포인트가 된 작품이다. 박진우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다. 군대 갔다 온 뒤 안 해본 역할을 하려고 했다. '정도전'이 시작이었다. 이전까지는 반듯하고 착한 이미지만 연기했는데 안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를 좋게 소화했다는 평을 들었다. 도전하고 좋은 평 받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도전을 계속해야 할 것 같다"며 웃었다.
이제 시작이다. 모범생, 실장님 캐릭터 외에 아직도 보여줄 게 너무나 많다. 박진우는 "옛날에 '초고속 엘리베이터 타는 스타가 아니라 한계단씩 올라가는 국민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 있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아, 그래. 저 배우'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편안하고 인간적인 면이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백지은 기자 silk781220@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