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팀에서 15년간 쉬지 않고 달려왔던 코트, 수년간 괴롭히고 있는 발바닥 부상, 또 다시 쟁취한 우승, 하지만 늘 익숙했던 주연이 아닌 조연의 자리.
어느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칠 수 밖에 없었다.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번아웃'이 온 것. 그래서 돌아올 기약없이 떠났고, 6개월을 일반인처럼 지냈다.
나태해지고 안일해질 수도 있었던 순간, 농구를 처음 시작할 때처럼 머리를 짧게 깎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결국 동고동락했던 동료들, 그리고 자신의 집과 같은 코트가 그녀를 다시 불렀다. 우리은행 박혜진 얘기다.
박혜진은 4일 부산사직체육관서 열린 '우리은행 우리WON 2023~2024 여자프로농구' BNK썸과의 경기에서 10득점-11리바운드-11어시스트로 생애 두번째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고, 팀은 84대66으로 크게 이겼다.
이틀 전 혈전을 벌이고 홈인 부산으로 돌아온 BNK는 선수들의 체력 부담으로 인해 3쿼터부터 벤치 멤버가 대거 나올 때부터 승부는 사실상 기울었지만, 우리은행 위성우 감독은 경기 막판 박혜진과 함께 박지현 최이샘 등 주전들을 계속 기용했고, 이들은 마치 숙제를 해야하는 듯 박혜진의 패스를 받아 열심히 골을 넣었다. 경기 종료 47초가 남긴 시점에야 비로소 박혜진은 벤치로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예상을 훌쩍 넘어 일찍 코트로 돌아와준 베테랑에 대한 코칭 스태프와 선수들의 미안함과 감사함의 표시였다.
경기 후 위 감독은 "비록 승부는 어느 정도 결정됐지만 (박)혜진이의 기록 달성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서, 흔히 잡기 힘든 기회이기에 조금 배려를 해줬다. BNK에는 너무 미안했다"고 말했다. 냉철한 승부사로, 늘 선수보다 팀을 앞세우고, 좀처럼 선수 개개인의 칭찬을 하지 않는 위 감독이지만 그동안 팀을 위해 많이 고생했던 박혜진에게 만큼은 예외일 수 밖에 없었다.
말은 안했지만 위 감독은 박혜진이 올 시즌 정규리그에서 뛰기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지나친 부담감으로 인해 KB스타즈 박지수가 지난 시즌 공황장애라는 마음의 병을 겪었던 것처럼, 오프시즌 훈련에도 참여하지 못할 정도로 심적으로 지친 박혜진에게 빨리 복귀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레이드로 영입한 유승희가 첫 경기에서 십자인대 파열로 시즌 아웃을 당하며 초반부터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상황에서 박혜진은 시즌 4번째 경기부터 자청해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박혜진은 "팀의 배려로 충분히 쉬면서, 박신자컵도 TV로 지켜볼 정도로 일반인처럼 지냈다"며 "6개월만에 팀에 인사를 왔는데, 너무 반갑게 맞아주시는 것을 넘어 우는 후배까지 있었다. 그래서 더 빨리 복귀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안일하고 나태해지면서 내려놓고 싶을 정도의 '번아웃' 같은 것이 왔지만, 마음을 추스리고 몸도 좋아지니 다시 농구가 고파졌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해보고 싶어 머리를 짧게 깎았다"며 "요즘 신인 선수들보다 짧은 것 같다. 여자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사람들이 놀라는 경우도 있었다"며 씩 웃었다.
박혜진은 실전을 통해 경기 체력을 회복하고 있기에 아직 정상 컨디션은 아니지만, 득점력만 예년에 비해 조금 떨어질 뿐 큰 무리없이 적응을 해나가며 팀 전력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다소 부담을 덜어놨기에 두번째 트리플 더블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간 박혜진의 '시즌2'가 기대되는 이유다.
부산=남정석 기자 bluesky@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