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용인실내체육관에서 2012-2013 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3차전 우리은행과 삼성생명의 경기가 열렸다. 66대53으로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한 우리은행 선수들이 모자를 날리며 기뻐하고 있다. 용인=김경민 기자 kyungmin@sportschosun.com / 2013.03.19. |
'기적'이면서도 '기적'이 아니다. 우리은행이 7년 만에 여자프로농구 챔피언에 당당히 등극했다. 정규시즌에 이어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따낸 것이다. 지난 4년간 '꼴찌'에만 머물던 팀이 기적을 이뤄냈다.
밑바닥에 남아있던 열정에 불이 붙다
우리은행은 한때 여자농구계의 '명가'로 통했다. 2006 겨울리그 우승을 차지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마치 모래성이 파도에 사라지듯 '명가의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한 번 추락하기 시작한 우리은행에는 날개도, 낙하산도 없었다. 지난 2008~2009시즌부터 지난 시즌까지 무려 네 시즌 연속으로 여자농구 리그 최하위의 자리는 우리은행의 몫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그 밑바닥에도 아직 남은 게 있었다. '열정'이었다. 진흙속의 진주처럼 몰래 감춰져 있어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그걸 알아차린 것이 바로 새롭게 팀의 지휘봉을 잡은 위성우 감독이었다. 여자 프로농구의 레전드에서 코치로 변신해 위 감독과 함께 지난해 신한은행에서 우리은행으로 옮긴 전주원 코치도 마찬가지로 그 숨겨진 가능성을 봤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일은 그 열정을 꺼내고, 빛을 내는 것 뿐이었다. 위 감독과 전 코치는 혹독한 훈련으로 열정을 되살렸다. 훈련 시간이 워낙 길어지는 바람에 저녁 식사 시간이 뒤로 밀리자 선수단 숙소의 식당 직원들이 항의를 했을 정도다. 코트에서 흘리는 땀방울에는 선수들의 열정을 가렸던 패배의식도 함께 녹아나왔다. 켜켜이 쌓인 패배의식이라는 '때'를 벗겨내자 선수들의 열정은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올랐다. 주장이자 챔피언결정전 MVP에 오른 임영희는 "계속 꼴찌만 할 때는 경기장에 나가는 것조차도 싫었다. 3, 4쿼터가 되면 '이러다가 또 지겠다'며 포기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위 감독님은 연습경기부터라도 이기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실제로 이기고 보니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말했다.
위 감독은 "선수들을 처음 봤을 때 '어떻게 이렇게 잘 하는 선수들이 수 년간 꼴찌를 했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족한 점과 그 원인을 찾으려고 많이 연구했다. 코치들과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방법들을 찾아나갔다"면서 "흔히 '지옥훈련'이라고 하는데, 진짜 극한으로 몰고 선수들을 다그쳤다. 선수들의 신장이 크지 않아서 빠른 농구를 해야만 승산이 있는데, 그러려면 3, 4쿼터에도 힘이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훈련을 엄청나게 시켰다. 솔직히 많이 힘들었을 거다. 남자선수도 소화하기 힘든 훈련이었는데, 그걸 잘 견뎌내줬다"고 밝혔다.
이름값으로 농구하지 않았다
우리은행 선수들은 화려하지 않다. '스타'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선수들이 대부분이다. 임영희도 뛰어난 슈터지만, 변연하나 김정은 등에 비하면 1급이라 할 수 없다. 양지희 배혜윤 박혜진 이승아 김은혜 등이 대부분 그렇다. 한때 잠시 이름을 얻은 선수도 있지만, 우리은행의 깊은 침체기 동안 묻혀버렸다.
그게 오히려 강점이 됐다. 위 감독은 선수단을 혹독하게 훈련하면서 B급 선수들이 A급 선수들을 잡을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 조직력이었다. 한 손이 감당하기 어렵다면 두 손을 쓰면 된다. 일대일 매치업에서 밀리면 더블로 수비하면 되고, 흐름이 밀린다면 그간 쌓아놓은 체력을 활용해 전면에서 압박하면 통했다.
결국 우리은행은 탄탄한 조직력으로 강팀이 됐다. 선수들의 이름값 대신 '우리은행'이라는 팀 이름 아래 하나로 모여든 것이다. 뭉치고 뭉친 우리은행 선수들의 조직력은 다른 팀에는 철옹성과 같았다. 신한은행이나 삼성생명 등 화려한 선수진을 갖춘 팀이 우리은행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조직력이었다.
이날 우승 후 위 감독은 "선수들이 많이 성장하면서 그 과정에 또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오늘보니 정말 우리 선수들이 잘 했다. 그간 내 눈에만 부족했던 것 같다"면서 "선수들을 계속 성장시키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모친상을 딛고 경기장에 온 전주원 코치의 헌신
우리은행은 천운마저 함께 했다. 이번 시즌부터 포스트시즌 운영방식이 변한 것도 그 하나의 예다. 종전 정규리그 1-4위, 2-3위 팀끼리 대결을 펼쳐 챔피언전 파트너를 고르던 방식에서 3-4위 대결, 그리고 여기에서의 승자와 2위팀의 대결, 마지막으로 여기서 이긴 팀이 정규시즌 우승팀인 우리은행과 챔피언전을 펼치는 식으로 포스트시즌이 운영되면서 체력을 크게 세이브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전주원 코치의 헌신도 들 수 있다. 전 코치의 어머니가 지난 18일 갑자기 별세했다. 먼저 2승을 거두며 우승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맞은 청천벽력의 비보였다. 전 코치는 빈소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빈소 대신 19일 3차전이 열린 용인체육관을 찾았다. 자신은 어머니를 잃었지만, 선수들에게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던 자신이 경기장에 없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또 우승컵을 어머니 영전에 바치겠다는 각오도 있었다.
전 코치가 경기장에 온다는 사실을 들은 우리은행 선수들의 투지는 몇 배로 증폭됐다. 결국 경기 전 기세에서부터 우리은행은 이기고 들어간 셈이다. MVP 임영희는 경기 후 "전 코치님의 어머님 영전에 우승컵을 바치게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선수들이 모두 마음을 모았다"고 밝혔다.
용인=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