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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이원만 기자] 아버지의 '야구천재 DNA'를 그대로 이어받은 이정후(27·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개막전 역전승의 주역이 됐다. 예리한 선구안으로 두 번이나 볼넷을 골라냈고, 그때마다 홈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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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색이 짙어진 2사 1, 3루 상황. 6번타자 패트릭 베일리가 해결사 역할을 했다. 볼카운트 3B1S에서 5구째를 잡아당겨 우중간을 가르는 적시타를 날렸다. 이정후가 가볍게 홈을 밟아 3-3 동점을 만들었다.
MLB 기록에 따르면 이 승리는 샌프란시스코 구단 역사상 최초의 '개막 원정경기 9회 역전승'이었다. 그리고 이 귀중한 기록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주인공이 바로 이정후였다.
이날 이정후의 스윙은 90마일대 후반의 강속구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시범경기 후반에 생긴 허리 통증의 여파가 남아있는 듯 했다. 이정후는 시범경기 초반에는 타격감이 좋았다. 초반 12경기에서 타율 0.300(30타수 9안타)에 OPS 0.967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15일 생긴 허리 통증의 여파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했고, 그 과정에서 타격감이 뚝 떨어졌다.
천만다행으로 허리 통증은 사라졌지만, 좋았던 타격감도 함께 사라졌다. 결국 이정후는 시범경기 막판 11타수 연속 무안타로 침묵했다. 이 여파가 개막전까지 이어졌다.
1회초 2사 후 첫 타석에서 신시내티 선발 헌터 그린의 강속구에 배트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건 이정후 뿐만이 아니었다. 이날 신시내티 개막 선발 그린의 구위는 무시무시했다. 선두타자 웨이드는 유격수 뜬공, 2번 아다메스는 스탠딩삼진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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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는 혼신을 다해 배트를 돌렸지만, 허공만 갈랐다. 이렇게 첫 타석은 헛스윙 3구 삼진. 좋은 출발이 아니었다. 팀의 중심타자인데, 메이저리그 에이스급 투수의 공을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실패 이후 이정후의 천재성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타자의 무기가 스윙 만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보여주며 KBO무대에서 발휘됐던 천재적인 'BQ(Baseball IQ)'를 재현해냈다. 스윙 스피드가 다소 부족하자 예리한 선구안으로 승부의 방향을 돌렸다.
사실 타자의 본래 목적은 출루에 있다. 현대 야구에서 전통적인 타율보다 출루율의 가치가 더 높이 평가 받는 이유다. 이정후는 이 목적을 충실히 수행해냈다.
0-3으로 뒤진 4회초 1사 후 두 번째 타석에 나와 그린과 두 번째 승부를 펼쳤다. 그린은 4회 1사까지 10명의 타자를 상대해 1피안타 무실점에 삼진 7개를 잡아내는 괴력을 펼치고 있었다.
이정후는 방망이가 아닌 눈으로 이런 그린을 이겨냈다. 초구 98.3마일(158.2㎞) 포심패스트볼이 스트라이크존에 꽂히는 걸 지켜봤다. 그린은 자신감에 가득찼다. 2구째 스플리터(88.3마일)을 몸쪽으로 던졌는데, 바닥으로 떨어지며 볼이 됐다.
이때부터 제구가 흔들렸다. 98마일대의 포심이 제어가 안되는 듯 했다. 3구째가 바깥쪽 높은 곳으로 향했다. 4구째는 반대로 아예 몸쪽으로 들어왔다. 이정후는 이 과정을 전부 침착하게 지켜봤다. 결국 볼카운트 3B1S에서 5구째 포심도 몸쪽 스트라이크존에서 살짝 벗어나 볼이 됐다. 아슬아슬한 위치였는데, 이정후가 잘 참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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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빠르게 승부의 방향을 선구안으로 바꾼 이정후가 만들어낸 이날 경기의 변곡점이었다.
이정후는 2-3으로 따라붙은 6회초 2사후 세 번째 타석 때는 상대 두 번째 투수 스캇 바로우와 불카운트 승부 끝에 헛스윙 삼진을 당했다. 바로우의 예리한 스위퍼에 방망이를 헛돌렸다. 변화구 대처능력도 좀 더 재조정이 필요한 듯 보였다.
하지만 9회 네 번째 타석에서 또 한번 볼넷을 골라나갔다. 1사 후 타석에 나온 이정후는 신시내티 마무리 지보와의 승부에서 볼넷을 만들었다.
명승부였다. 먼저 2S의 불리한 상황이 됐지만, 침착하게 3개의 바깥쪽 높은 유인구에 속지 않았다. 풀카운트가 되자 지보는 승부구를 던졌다. 6구와 7구에 각각 94.7마일과 93.3마일 포심을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존에 꽂았다. 좌타자 이정후에게 극악의 코스다. 하지만 이정후는 이걸 다 파울로 걷어냈다.
승부구가 막히자 당황한 지보는 8구째로 비장의 무기 스위퍼를 던졌다. 하지만 제구가 흔들려 바깥쪽 높은 코스로 날아가 버렸다. 이정후는 여유있게 지켜보며 1루로 걸어나갔다. 여기서부터 샌프란시스코 대반격의 서막이 열렸다.
이날 결국 이정후는 2타수 2볼넷 2삼진 2득점을 기록했다. 비록 개막전 안타를 치지 못한 점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제 몫은 충분히 해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예리한 선구안으로 출루능력을 보여줬고, 또 이때마다 팀이 점수를 내는 발판이 됐다. 승리기여도가 상당히 높은 경기였다.
첫 출발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이정후가 얼마나 영리한 선수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타격감만 올라오면 샌프란시스코의 키플레이어로서 더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을 듯 하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