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타임머신] 류중일·이강철…10구단 감독의 청춘은 어땠나?

정재근 기자

기사입력 2020-03-20 06:00


강철같이 단단한 몸매의 이강철과 물 위를 나는 남자 류중일의 빛났던 젊은 시절

[스포츠조선 정재근기자] KBO리그 10구단을 이끄는 10명의 감독은 어떻게 젊은 시절을 보냈을까?

'류중일·한용덕·맷윌리엄스·이강철·김태형·염경엽·허삼영·허문회·손혁·이동욱(나이 순서대로)'은 대한민국 프로야구 직업군의 정점에 오른 10인이다. 야구인이라면 누구나 꿈꾸지만 결코 아무나 될 수 없는, 또 됐다 하더라도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극한직업 10인의 지난 온 시절을 찾아봤다.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으로 그라운드를 빛내던 스타플레이어, 연습생 신화의 주인공, 평범하거나 무명의 선수 시절을 보냈지만 코치 혹은 프런트로 능력을 발휘한 사람, 태평양을 건너온 메이저리거 출신 등 다양한 경력의 사령탑들이 프로야구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준비를 하고 있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류중일-이강철 감독, 연습생 신화를 쓴 한용덕 감독, 선수시절 부터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준 김태형 감독, 감독 선임 트렌드를 바꾼 염경엽 감독, 인정받는 코치에서 감독이 된 허문회-손혁-이동욱 감독, 전력분석 전문가에서 감독이 된 허삼영 감독, 메이저리그 올스타 출신의 맷 윌리엄스 감독. 각자 다른 방식으로 야구를 사랑했던 그들의 젊은 시절을 소환했다.


대한민국 유격수 계보를 잇는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 우상 김재박을 제치고 신인 골든글러브 수상



1963년생 58세의 류중일 LG 감독은 81년 경북고 2학년 때부터 초고교급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전국구 스타였던 박노준, 김건우의 선린상고를 연거푸 제압하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 3관왕을 이끌었다. 이듬해 7월 17일 잠실야구장 개장기념 우수 고교 초청대회에서 부산고를 상대로 개장 1호 홈런을 치며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한양대 시절 국가대표 유격수를 도맡으며 1987년 1차 지명으로 삼성에 입단했다. 단숨에 주전을 꿰찬 류중일은 그해 5월 10일부터 14일까지 '11타수 11안타'라는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는 기록을 세웠다. 그의 롤모델 김재박의 5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을 저지하며 신인으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수비하나만 놓고 봤을 때 전성기 시절의 류중일은 김재박보다 한 수 위였다는 평가도 있다. 1991년에도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류중일은 타격은 상대적으로 약했지만 타구 판단, 송구 능력, 글러브 핸들링 등에서 완벽한 유격수였다.

99년 37세에 은퇴할 때까지 13시즌 1095경기 874안타 45홈런 타율0.265의 기록을 남겼다. 류중일은 2000년 4월 삼성 구단 최초 은퇴식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은퇴 후 10년간 삼성 코치로 일하며 삼성의 수비 시스템을 완성했고 김응용 감독, 선동열 감독의 인정을 받았다. 2011년 삼성 감독으로 취임해 6년간 지휘했다. 5년 연속 정규시즌 우승,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연습생 신화의 두 주인공 한용덕과 장종훈
배팅볼 투수로 입단해 빙그레 전성기를 이끈 에이스



1965년생 56세의 한용덕 한화 감독은 동아대 재학시절 무릎 관절염과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야구를 포기해야 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노동판, 전기배선공, 트럭운전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지만 끝내 야구를 잊을 수가 없었다. 대전 구장을 기웃거리던 한용덕의 소식을 들은 북일고 은사 김영덕 감독이 그를 빙그레에 배팅볼 투수로 추천하며 야구를 다시 시작하게 됐다.


1987년 빙그레에 배팅볼 투수 겸 육성선수로 입단한 한용덕의 배팅볼은 이강돈, 이정훈, 강정길 등 당시 빙그레 타자들에게 먼저 인정을 받았다. 하이킥 후 힘을 빼고 던지는 듯한 한용덕의 투구폼은 배팅볼을 오래 던지기 위해 터득한 그만의 비법이었다. 그해 말 빙그레 2대 감독으로 취임한 김영덕 감독은 타자들의 추천 만을 믿고 한용덕을 정식 선수로 등록시켰다.

1988년 7월 해태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해 데뷔 첫 승을 거두며 한용덕의 야구 인생이 꽃폈다. 1990년 13승, 1991년 17승, 1994년 16승을 거두며 송진우와 함께 빙그레의 에이스로 군림했다.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해 3패 중이던 한국에 첫 승리를 가져오기도 했다. 하지만 꽃길만 걸을 듯했던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1994년 온 가족이 크게 다치는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것. 한용덕도 왼팔을 심하게 다쳤지만 야구를 그만두라고 할까 봐 제대로 치료도 못 한 채 3년간을 선발로 출전하며 기량 하락을 감내해야 했다. 마운드의 중심은 정민철, 구대성, 이상목으로 옮겨갔지만 한용덕은 왼팔 장애를 가진 채 마흔 살까지 빙그레 마운드를 묵묵히 지켰다. 2004년 40세에 은퇴한 한용덕은 통산 17시즌 482경기 2080이닝 120승 118패 24세이브 방어율3.54의 기록을 남겼다. 60번의 완투와 16완봉승을 기록했다.

은퇴 후 2005년부터 8년간 한화에서 투수코치로 활동했으며 2012년 중반 한대화 감독의 사퇴 후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이끌었다. 2013년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자 미국으로 코치연수를 떠났다. 9월 귀국해 단장 특별보좌역을 맡았다. 2015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자 결국 한화를 떠나 두산 투수코치로 부임해 김태형 감독과 함께 2년 연속 우승을 이끌었다. 2017년 두산 수석코치를 역임한 후 2018 한화 감독에 선임됐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내셔널리그 홈런왕. 5번의 올스타, 4번의 골든 글러브와 실버슬러거

1965년생 56세의 맷 윌리엄스 KIA 감독은 1986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89년 18홈런을 기록한 후 풀타임 3루수로 자리 잡은 90년 33홈런을 터트리며 거포 3루수의 탄생을 알렸다. 94년 선수노조 파업으로 팀당 113~115경기만 치른 시즌에 43홈런으로 내셔널리그 홈런왕을 차지했다. 97년 클리블랜드에서 1년을 보낸 후 98년 애리조나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2001년 애리조나의 월드시리즈 우승 때 4번타자 3루수로 활약하며 마무리 김병현을 위로하던 모습을 야구팬들은 기억한다. 2003년 39세에 은퇴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메이저리그 통산 1866경기를 뒤며 1878안타, 378홈런, 1218타점, 타율0.268을 기록했다. 5번 올스타에 선정됐고 4번의 골든글러브와 4번의 실버슬러거를 수상했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리그 최고의 3루수, 샌프란시스코와 애리조나의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다. 은퇴 후 코치 생활을 계속해왔다. 특히 2014시즌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을 맡아 팀을 포스트시즌으로 이끌며 내셔널리그 올해의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SUN에 가린 2인자의 가장 빛나는 기록 '10년 연속 10승'

1966년생 55세의 이강철 KT 감독은 광주일고와 동국대를 나와 1989년 1차 2순위로 해태에 입단했다. 데뷔 해부터 15승 8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3.23의 활약을 펼쳤다. 1992년에는 18승을 거뒀지만 송진우의 19승에 밀려 아깝게 다승왕을 놓쳤다. 눈부신 활약에 비해 타이틀 복이 없는 선수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빛나는 기록은 10년 연속 10승(16-15-18-10-12-10-10-11-15) 기록이다.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는 대단한 업적이다. 현재 유희관이 7시즌 연속 10승을 올리며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


1989년, 91년, 93년, 96년, 97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9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 완봉승, 5차전 세이브, 6차전 선발승, 방어율0.56으로 우승을 이끌며 MVP를 수상했다. 89년부터 99년까지 해태에서 뛰었고 2000년 삼성으로 이적해 두 시즌을 뛰고 다시 KIA로 돌아와 2005년 마흔의 나이에 은퇴했다. 통산 16시즌 602경기 152승 112패 53세이브 33홀드 방어율3.29를 기록했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KIA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2013년 염경엽 감독의 요청으로 넥센 수석코치로 부임해 4년을 함께 했다. 2017년 두산으로 팀을 옮겨 2군 투수코치, 2군 감독을 거쳐 2018년 1군 수석코치를 지낸 후 2019년 KT 감독에 선임됐다.


OB(두산)의 V2를 이끈 안방마님, 개성 강한 선수들 이끈 캡틴

1967년생 54세의 김태형 두산 감독은 신일고와 단국대를 졸업한 후 1990년 OB에 입단했다. 80년대 김경문과 조범현의 뒤를 이어 90년대 OB 안방을 책임진 포수다. 김태형은 타격은 약했지만 투수 리드와 수비가 좋았다. 습관성 탈구로 고생했지만 빠른 풋워크와 정확한 송구로 승부를 걸었다. 95년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차전 패배 후 2차전부터 김태형이 포수 마스크를 쓰고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우승을 이끌었다. 단기전에서 수비형 포수의 중요성을 보여준 순간이었다. 1999년 홍성흔이 등장하기까지 김태형은 포수 왕국 OB의 안방을 묵묵히 지켰다.


자유 방임형의 김인식 감독 체제에서 김태형은 98년부터 2000년까지 팀의 주장을 맡아 개성 강한 젊은 선수들(강병규, 김동주, 정수근, 이혜천 등)을 강력하게 제어했다. 팀워크를 해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면 바로 지적했다. 외국인 선수도 예외는 없었다. 타이론 우즈는 김태형의 따끔한 지도를 받고 순한 반달곰이 됐다. 2001년에는 플레잉코치로 두산 V3를 함께 한 후 35세의 나이에 은퇴했다. 프로통산 12시즌 동안 827경기에 출전해 타율0.235, 432안타, 9홈런, 157타점을 기록했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두산 배터리코치를 역임하며 포수왕국의 명성을 이어갔다. 2012년부터 2년간 SK로 팀을 옮겨 배터리 코치로 활동한 후 2015년 두산 감독에 선임됐다.


아쉬웠던 현역 시절, 프런트로 재능 빛나며 제2의 야구 인생 시작

1968년생 53세의 염경엽 SK 감독은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나와 91년 2차 1라운드 전체 4번으로 태평양에 입단했다. '제2의 류중일'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타격에서 많은 아쉬움을 드러내며 큰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96년 대형 유격수 박진만의 등장으로 염경엽의 입지는 더욱더 좁아졌다. 결국 2000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결정했다. 프로통산 10시즌 896경기에 출전해 타율0.195, 283안타 5홈런 110타점 83도루를 기록했다.


염경엽의 인생 반전은 은퇴 후 구단 프런트로 재능을 발휘하면서 시작됐다. 2001년 34세의 한창나이에 현대 운영팀 직원으로 프런트 일을 시작했다. 프런트 일을 하면서도 언젠가 코치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공부했다. 경기 결과를 분석하고 야구와 관련된 모든 것을 항상 메모했다. 김용휘 현대 사장으로부터 '머리가 비상하고 집념이 대단하다'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운영팀에서 5년을 일한 염경엽은 드디어 2007년 꿈에 그리던 코치경력을 현대에서 시작했다. 비록 현대가 1년 만에 해체됐지만 LG 스카우트와 운영팀장, 수비코치, 넥센 주루코치로 일하며 경력을 쌓아갔다. 염경엽은 2013년 넥센 감독으로 임명되며 모두가 놀라게 했지만 팀을 꾸준히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며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염경엽은 감독 선임의 트렌드를 바꾼 선구자가 됐다.


전력분석의 대가. 코치 경력 없는 프런트 출신 최초 감독

1972년생 49세의 허삼영 감독은 대구상고(현 상원고)를 졸업하고 1991년 고졸우선지명으로 삼성에 입단했다. 90년 고교 3학년 때 강속구를 뿌리며 대붕기 우승 MVP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프로 입단 후 성적은 초라했다. 허리디스크로 고생하며 통산 4경기 출전이 전부다. 결국 5년 만에 은퇴해야 했다.


그러나 허삼영은 야구단을 떠나지 않았다. 96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프런트 일을 시작했다. 선수들의 훈련을 돕는 훈련지원 요원으로 일하며 공 줍는 일부터 연습경기 기록을 적는 일까지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성실성을 인정받아 98년부터는 전력분석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카메라로 영상을 찍고 차트 만들어 전산입력까지 차곡차곡 분석자료를 만들어나갔고, 5년 후에는 정직원이 돼 전력분석팀을 이끌었다. 6300경기, 11만3400이닝을 지켜보고 분석하며 삼성의 7번 우승을 함께한 허삼영은 삼성 전력분석팀을 최고로 끌어올린 전력분석의 대가로 평가받았다. 냉철한 판단과 정확한 분석, 활발한 의사소통으로 코치와 선수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은 허삼영은 마침내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됐다.


서용빈에 밀린 국가대표 1루수,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버틴 선수생활. 지도자로 꽃핀 능력

1972년생 49세의 허문회 롯데 감독은 경성대 졸업 후 94년 2차 1라운드 9순위로 해태 입단, 4대2 트레이드로 LG에 이적해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대학 시절 국가대표 1루수이자 대형 좌타자로 이름을 날리며 LG 주전 1루수를 예약했지만 94년 LG 신바람 야구의 주인공은 1라운드 허문회가 아닌 6라운드로 입단한 서용빈이었다. 허문회는 같은 해 51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4의 좋은 타격을 보여줬지만 서용빈의 놀라운 기세를 이길 수 없었다. 야구를 그만둘 생각도 했고 항상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1년 1년을 살았다. 99년 28세 때 78경기 190타수 59안타 6홈런 39타점 타율0.311로 정점을 찍었다. 2001년부터 2년간 롯데로 이적했다가 2003년 LG 컴백 후 32세에 은퇴했다. 프로통산 10시즌 523경기 1018타수 274안타 20홈런 129타점 타율0.269를 기록했다.


허문회는 은퇴 후 프로가 아닌 세광고와 춘천고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 LG 2군 타격코치를 시작으로 상무와 넥센 타격코치로 일하며 박병호, 강정호, 서건창, 유한준의 잠재력을 깨우는 데 큰 도움을 줬다. 못 치는 선수를 닦달하지 않으며 파워와 멘탈을 중요시한 허문회의 지도 철학이 꽃핀 시기다. 고교야구 선수는 타격폼을 수정하고 올바른 폼으로 바꿔줄 수 있지만 프로선수는 쉽지 않다. 허문회는 함부로 선수의 타격폼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타자들의 방망이는 마침내 폭발했다. 화성 히어로즈 타격 코디네이터를 거쳐 키움 수석코치로 2년간 일한 허문회는 2020년 롯데 감독에 임명됐다.


절묘한 체인지업과 안정된 제구력으로 구속 약점을 이겨낸 기교파 투수. 선진야구 흡수한 투수 이론가

1973년생 48세의 손혁 키움 감독은 92학번 황금세대다. 박찬호와 공주고 동기로 고려대를 졸업하고 96년 2차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LG에 입단했다. 에이스 이상훈이 마무리로 전향하며 손혁은 LG 선발진에 진입했다. 입단 3년 차인 1998년 11승을 거두며 현대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활약했다. 3차전에 선발등판해 승리투수가 되고 3일 쉰 후 6차전 선발로 등판했지만 자기 공을 못 믿고 도망 다니는 피칭을 하다 이숭용에게 결승포를 허용했다. 선수 인생 하이라이트이자 가장 후회되는 일(자기 공을 못 믿은 것)로 꼽는 순간이다. 2000년 3월 해태로 트레이드된 것에 반발해 은퇴를 선언했다가 11월 복귀했다. 2002년 어깨 수술 후 2003년 두산으로 팀을 옮겨 4승을 거두며 재기하는 듯했지만 결국 2004년 봄 32세에 은퇴했다. 프로통산 8시즌 107경기 508이닝 36승 31패 방어율4.07을 기록했다.


프로골퍼 한희원과 결혼한 손혁은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아내의 LPGA 투어를 뒷바라지하며 영어를 배웠다. 투수 이론가 톰하우스 피칭클리닉에서 코치, 재활트레이닝 교육을 받던 중 메이저리그 도전을 권유받아 2007년 뉴욕메츠 산하 트리플A 노폭 타이즈에서 선수로 뛰었다. 하지만 다시 어깨를 다쳐 메이저리그 도전은 포기해야 했다. 2009년 김인식 감독의 한화 스프링캠프에서 투수 인스트럭터로 일하며 코치 생활을 시작했고 톰하우스에게서 배운 이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대를 위한 투수교과서'를 출간해 호평받았다. 2015~2016년 넥센 1군 투수코치, 2018~2019년 SK 1군 투수코치로 일한 후 2020 키움 감독에 임명됐다.


추억의 기론이 홈런을 치고 들어온 이동욱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
성실성, 명석한 두뇌와 해박한 야구지식으로 30세부터 시작한 코치 경력

1974년생 47세의 이동욱 NC 감독은 동아대를 졸업하고 97년 2차 2라운드 13순위로 롯데에 입단했다. 동아대 시절인 96년 천마기대회 MVP를 차지하며 애틀란다 올림픽 야구대표팀에 발탁되기도 했다. 롯데 입단해 2루수를 맡았지만 박정태의 아성이 너무 컸다. 게다가 무릎부상으로 수술까지 하며 2년 차에는 1군에 올라오지도 못했다. 주로 2군에서 뛰던 이동욱은 2002년 시즌 중반 취임한 백인천 감독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1군에 발탁돼 79경기 45안타 3홈런 타율0.268을 기록하며 최고 시즌을 보냈지만 다음 해인 2003년 10월 방출 통보를 받고 은퇴를 결정했다. 프로통산 6시즌 143경기 272타석 60안타 5홈런 타율0.221을 기록했다.


30세에 은퇴한 이동욱에게 롯데는 곧바로 2군 수비코치를 맡겼다. 그의 명석한 두뇌와 해박한 야구 지식을 높이 평가한 것. 2년 동안 수비코치를 한 후 2006년에는 롯데 전력분석원으로 일하며 온갖 잡무를 도맡았다. 마산구장 볼펜을 5시간 만에 만든 일화도 있다. 2007년부터는 LG 2군 수비코치로 5년간 활동하다 김경문 감독의 요청으로 2012년 NC 창단 수비코치로 합류했다. 2군 구장이 따로 없어 컨테이너 숙소 생활을 하며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렸다. 6년간 NC 수비코치로 롱런하며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서 호평받았다. 2018년 김경문 감독 사퇴 이후 잔류군 수비코치로 잠시 이동했던 이동욱은 2018년 10월 NC의 2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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