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기자들에게 이승엽은 특별한 선수였다. 1995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이승엽(41)은 8년간의 일본 프로야구 생활을 제외하고도 15시즌을 뛰며 역대 최다홈런(463개), 최다타점(1495개), 최다득점(1351개), 최다루타(4066)를 기록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스포츠조선 1면을 장식한 횟수도 부지기수였다.
20년 안팎으로 스포츠 현장을 누빈 민창기 박재호 권인하 기자가 기억하는 이승엽은 '한결 같았던 선수',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선수'였다. 현장에서 기자들이 기억하는 이승엽을 돌아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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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연락을 받고 한동안 어안이 벙벙했다. 거짓말같은 이승엽의 2군행,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승엽 23년 프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는다면, 일본 진출 첫 해인 2004년이 포함될 것 같다. 56홈런 아시아홈런 신기록을 수립하고 일본행. 지바 롯데 마린스 입단 때부터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됐다. 가고시마 캠프 기간에 보비 발렌타인 감독은 이승엽을 전담 취재하는 특파원들과 간담회까지 했다. 이런 큰 기대가 부담이 됐는 지, 다른 스타일의 야구가 낯설었는 지, 순조롭게 자리잡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플래툰 시스템이 적용됐고, 출전 시간이 줄어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사람좋은 이승엽은 크게 내색은 안 했지만,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날 경기 전 타격훈련을 마친 그가 더그아웃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국 취재진에 툭 한마디 던졌다. "제가 왜 일본 야구에 적응 못했다는 거죠?"라고 하더니, 라커로 들어가 버렸다. 부진 원인을 다룬 보도에 대한 이승엽 방식의 불만 표출이었다. 경기에서 부진했을 때 그는 취재진을 피해 야구장을 빠져나갈 때도 있었다. 허탈하기도 했지만, 그가 조금 더 의연하고 강한 모습으로 어려움을 이겨내기를 기원했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승엽은 첫 해 굴욕을 딛고, 중심 타자로 거듭나 2005년 팀 우승에 기여했다. 지바 롯데와 2년 계약이 끝나자 보란듯이 최고 조건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4번 타자로 활약했다. 팬으로서 뿌듯했다. 운 좋게도 기자는 2005년 지바 롯데의 포스트시즌, 2006년 요미우리 입단식, 미야자키 첫 캠프를 현장 취재했다. 이승엽 프로 인생의 작은 부분이긴 해도 일부를 지켜본 셈이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 이승엽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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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와 배구를 취재하다 1998년 1월에 야구를 취재하게 됐다. 그해 관심사는 삼성 이승엽과 두산 타이론 우즈의 홈런경쟁이었다. 우즈가 42홈런으로 KBO리그 최다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IMF 직후 힘든 시기 이승엽의 홈런은 프로야구의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스포츠조선 해설위원이었던 고 하일성 전 KBO 사무총장, 허구연 해설위원이 이승엽을 동시에 인터뷰하는 특집기사도 담당했다. 유난히 웃음이 많았던 22세 이승엽을 기억한다.
1999년 기자는 쌍방울 담당이었다. 꼴찌팀이라 기사거리가 부족해 이승엽을 전담 마크하게 됐다. 그해 이승엽은 KBO리그 홈런신기록을 넘어 아시아 홈런 신기록에 도전했다. 54홈런에 그쳤지만 리그 전체에 신드롬을 일으켰다. 경기전 가장 먼저 운동장에 도착해 연습하고, 연습전후 훈련물품을 챙기고 선배들 시중을 들던 이승엽. 그때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반듯하게 인사 잘하는 청년으로 유명했다.
시간이 흘러 2002년 일본특파원 시절 구대성(당시 오릭스) 등판경기 취재를 갔다가 오사카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신칸센 안에서 이승엽의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동점 스리런 소식을 사무실에서 전화로 전해들었다. 이승엽의 꿈이 이뤄지던 순간이 아니었을까.
축구, 골프, 경제산업 등 다양한 출입처를 돌고 돌아 2015년 다시 프로야구를 취재하게 됐다. 2015년 6월 3일 포항에서 이승엽은 롯데 구성민을 상대로 개인통산 400호 홈런을 때려냈다. 경기후 인터뷰를 하던 이승엽이 성큼 성큼 다가와 덥석 기자의 손을 잡았다. "야, 이게 얼마만입니까. 기자님도 늙었고, 저도 늙었네요. 하하."
올해 초 신인들 앞에서 강사로 나선 이승엽을 만났던 눈오던 날 오후 대전. 은퇴 후 걱정을 하던 이승엽. "뭐를 하면 좋을까요?" 되묻기도 했다. '뭐를 하든 당신이 하면 특별한 일이 될 것'이라는 얘기해줬다. 부단히 노력했든 이승엽. 야구든, 사회생활이든. 그의 앞날에 멋진 시간들만 넘쳐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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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그해 팀 순위는 관심없었다. 오로지 이승엽이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쏘느냐에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려있었다. 이승엽 홈런공을 잡기 위해 수많은 잠자리채가 야구장 외야석을 덮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이런 기록을 앞둔 선수가 받을 스트레스는 얼마나 클까.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대기록을 앞둔 선수는 대부분 경기 전 인터뷰를 사양한다.
당시 대구구장을 찾았던 기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삼성 훈련이 끝날 때까지 취재진 중 누구도 이승엽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승엽 역시 묵묵히 훈련만 했다. 이승엽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훈련이 끝나고 경기 준비를 마친 이승엽이 혼자 더그아웃에 나왔다. 선수들의 훈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인터뷰를 뒤로 미룬 것이다. 그는 극심한 홈런 스트레스 속에서도 취재진과 농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이며 즐겁게 얘기를 나눴다. 그는 다음날에도 훈련이 다 끝난 뒤에 나와 취재진을 맞았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큰 팬들과 그것을 위해 찾아온 취재진을 배려하는 마음.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동료들의 훈련에 방해가 될까봐 여러가지를 신경썼다.
그는 일본에서 뛸 때도 취재온 한국 기자를 먼저 맞았다. 일본에 진출한 몇몇 선수가 일본 기자나 외신 기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지만, 이승엽은 항상 한국기자를 챙겼다. 2011년 오릭스에 입단한 이승엽의 2월 미야코지마 전지훈련 때 일이다. 전지훈련 초반 취재를 왔던 한국 기자들이 돌아가고 기자만 혼자 남았을 때였다. 훈련장으로 함께 이동하면서 "어제 한국 기자들이 다 돌아가고 혼자 남았습니다"하자 그는 "그래도 이렇게 같이 있으니까 얼마나 좋습니까"라며 웃었다. 그의 따뜻한 한마디에 기분 좋게 남은 기간 동안 취재를 한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도 항상 진심을 다해 인터뷰를 하는 그는 진정한 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