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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한 방'이라고 했다. 한 방은 다른 말로 '기회'다. 그 기회를 잡느냐, 못 잡느냐. 야구도 똑같다.
그는 원래 언더핸드 투수였다. 경남고 시절, 호원대에 들어가서도 가장 밑으로 공을 던졌다. 그러다 대학 2학년 때 팔 각도를 올렸다. 고봉재는 "언더핸드로 대학에 들어왔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야구가 잘 되지 않아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변화를 줬다"며 "세게 던지고 싶었다. 사이드암로 바꾸면서 야구가 잘 됐다"고 했다. 아울러 "대학 시절 팀 전력이 투텁지 않아 자주 등판했다. 그러면서 스카우트가 좋게 봐주신 것 같다"고 웃었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높았다. 특급 유망주가 아닌 탓에 기대치는 높지 않았고, 하드웨어도 단단하게 만들 필요도 있었다. 때문에 마무리 훈련, 1,2군 전지훈련 명단에서 모두 제외됐다. 겨우내 국내에서 개인 훈련을 했다.
하지만 시범경기는 시범경기일 뿐, 당장 개막 엔트리에 포함될 자원은 아니었다. 김태형 감독과 1군 코칭스태프에 이름 석자를 알린 것만으로 만족했다. 이후 개막과 동시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고, 부족한 부분들을 보완하며 이천 생활을 했다. 예리한 맛이 없는 슬라이더를 집중적으로 가다듬었다. 그러자 1군에 콜업되는 '두 번째' 기회가 왔다. 5월 초였다. 고봉재는 "입단 후 처음 1군 엔트리에 등록됐다. 그 때 기분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그러나 못 던졌서 바로 엔트리에서 빠졌다. 그 때부터 2군에서 선발로 던졌다. 불펜 투수로 뛸 때는 정말 직구만 던졌지만, 2군 선발이 된 뒤로는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를 다 던졌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감이 조금씩 왔다"고 했다.
그러자 '세 번째' 기회도 곧 찾아왔다. 지난달 29일 다시 1군에 등록된 것이다. 이 때는 5월초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더 자신 있는 투구로 타자와 맞붙었다. 고봉재는 "어차피 나보다 연봉도 한참 높고 야구도 잘하는 선수들이다. 부담 없이 내 공만 믿고 던지자고 마음 먹었다"며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더 열심히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고창성과 비교되는 부분에 대해 "영광이다. 더 잘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겠다"고 웃었다.
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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