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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동안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1할대였던 타율이 어떻게 3할 후반대를 기록하고 있는 걸까.
역시 주된 원인은 심리적인 안정에서 찾을 수 있다. 2군에서 한 동안 방망이를 들지 않고 취한 휴식, 동시에 내려놓은 욕심.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자신의 타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산 전력분석팀 역시 "작년 트리플A에서 아무리 빼어난 성적을 올렸어도 이곳에서는 그저 이방인이다. 2년 전 일본 무대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해 꼭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은 듯 하다"며 "1군에 돌아온 뒤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서서히 잘 맞은 타구가 나오고 국내 투수들에게 타이밍도 맞아가면서 자신감을 찾은 것 같다. 결국 야구는 멘탈 게임 아닌가"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타구 질이 달라졌다. 비거리는 물론 방향도 이상적이다. 가장 큰 소득은 상대 배터리에 위압감을 주는 타자가 됐다는 사실. 최근에는 5경기 연속 장타를 때리면서 그를 향한 경계가 더 강화된 모양새다. 김태형 감독도 "원래 테이크 백이 거의 없는 타자이지만, 요즘 타석에서는 어느 정도 힘을 모았다가 타격하는 게 보인다. 모습이 확실히 달라졌다"며 "토종 선수들의 활약도 좋지만, 에반스가 쳐주니 팀 타선이 잘 돌아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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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향한 두 번째 분석은 '슬로우 스타터'다. 빠른 스윙 스피드, 타격시 임팩트를 가할 줄 아는 이 타자가 원래 서서히 달아오르는 유형이라는 것이다. 작년 기록이 이를 방증한다. 2015시즌 애리조나 산하 트리플A 리노 에이시스에서 뛴 그는 4월 성적이 좋지 않았다. 한 달간 19경기에서 타율은 0.247, 출루율(0.304)-장타율(0.411)을 합한 OPS는 0.715였다. 하지만 5월이 되자 전혀 다른 선수가 됐다. 28경기 월간 타율은 0.343, OPS도 0.990으로 치솟았다. 이후 에반스는 한 번 잡은 감을 끝까지 이어갔고, 결국 지난 시즌을 139경기 타율 310, OPS 0.860, 17홈런 94타점의 성적으로 마쳤다.
두산 관계자는 "1차 호주 캠프부터 2차 미야자키 캠프까지. 에반스가 새 환경 적응을 위해 서두른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간 몸에 밴 스케줄이 아니기 때문에 페이스 조절하는 데 힘들었을 것"이라며 "슬로우 스타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렸고, 이제야 제 실력이 나오는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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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부터 불펜에서 몸 푸는 사나이.
24일 kt전에서는 1회부터 누군가가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선발 마이클 보우덴이 5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했기에 투수일 리는 없는 상황. 등번호 44번의 건장한 에반스. 바로 그였다. 에반스는 애국가가 끝나자마자 불펜으로 이동해 거푸 스윙 연습을 했다. 방망이가 나오는 궤도를 체크했고, 철조망 사이로 그라운드를 흘깃흘깃 쳐다보기도 했다. 쉼 없이 진행된 이미지 트레이닝. 돌아올 자신의 타석을 위해서였다.
에반스는 이날도 6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했다. 수비가 좋은 오재일 복귀하면서 1루 미트를 끼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여느 선수와 마찬가지로 수비를 소화하고 타석에 서는 게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듯 하다. 충분한 땀을 흘린 상태로 스윙을 하는 데 익숙하다. 그래서 텅 빈 불펜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방망이를 돌리며 열을 내고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두산 통역 김용환 씨는 "미국에서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한 에반스가 지금은 수비하는 느낌을 갖기 위해 경기 중 불펜에서 몸을 푼다고 한다. 팀 사정상 지명 타자로 나가는 것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춰 나름의 변화를 줬다"며 "옆에서 봤을 때 흠 잡을 것이 없는 선수다. 경기 준비를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잠실=함태수 기자 hamts7@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