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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산에 올랐다. 일본 미야자키현 휴가시의 유명한 관광 명소인 주상절리 협곡 우마가세로 가는 산길. 아이들도 가볍게 뛰어 오르는 완만한 오르막길은 산에 익숙한 KIA 타이거즈 최희섭에게는 산책 코스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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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섭은 '잊혀진 선수'였다. 사실상 지난해 후반부터 유니폼을 입은 최희섭을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었다. 지난해 9월 무릎 수술을 받은 이후 1년 넘게 야구를 멀리했다.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그걸 다시 일일히 언급하는 건 현재 큰 의미가 없다. 최희섭은 "시작부터 별로 좋지 않았고, 야구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부상과 수술 그리고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 어쨌든 안좋은 일은 그때 다 경험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최희섭은 서서히 은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계속 운동은 하고 있었지만, 방망이는 잡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갑작스러운 변화가 팀과 최희섭에게 찾아왔다. 새롭게 김기태 감독이 부임한 것.
최희섭은 "그때 '여기서 끝내면 안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친한 서재응 선배에게 전화를 했더니 대뜸 '나 술 끊고 벌써 운동시작했다'고 하더라. 나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마음껏 배트를 휘둘러보고 싶어 팀에 마무리캠프 합류를 요청했다. 뜻밖에도 구단과 감독님이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동했다. 이건 정말 내 입장에서는 '기적'이나 마찬가지다"며 새로운 기회를 얻게된 감격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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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 이제 놓지 않는다
이번 미야자키 마무리캠프에서 최희섭은 의식적으로 배트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굳이 스윙 연습을 하지 않더라도 숙소에서까지 손에 쥐고 있다. "그래야 좀 더 빨리 감각이 살아날 수 있다. 그간 너무 오래 배트를 안잡았다"는 게 최희섭의 설명이다.
최희섭은 이번 캠프에서 매일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그는 "그라운드에서 다시 뛰어보니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지 절실히 깨달았다. 나이도 있고하니, 이제는 마무리를 해야할 시기다. 한번쯤 다시 야구를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했다"고 밝혔다.
지난 1년 여간 최희섭은 배트도 손에서 놓은 채 함평구장에서 산에 오르고, 웨이트 트레이닝만 했다. 그는 "배트는 손에서 놓았지만, 운동은 쉬지 않았다. 몸관리도 소흘히 하지 않았던 게 지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가족들도 내가 다시 야구를 할 수 있게되자 나보다 더 기뻐하고 있다. 그걸 보면 야구를 시작했던 처음의 마음을 떠올리게 된다"며 "그래서인지 시간이 정말 빨리간다. 매일이 기쁘고, 그간 알지 못했던 야구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손에 쥔 이 배트를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야구, 어디서든 해야한다
현재의 최희섭에게 '목표'는 오직 하나다. 다시 경기에 나설 수 있는 상태까지 감각을 되찾는 것이다. 타율이나 홈런 개수, 타점 등의 구체적인 수치는 아예 생각조차 않는다. 그는 "이번 마무리캠프에서는 타격과 수비 훈련 단계에 진입하는 게 목표다. 다른 것들은 그걸 해낸 다음에 생각할 문제"라고 했다.
더불어 최희섭은 "이 마음 하나를 지키면서 어디에서라도 야구를 하겠다"고 말했다. 요즘 야구계에서는 '보호선수 명단'이 최대 관심사다. KIA를 포함한 9개 구단은 24일 20인 보호 선수 명단을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제출했다. 그리고 '제10구단' kt가 29일까지 각 구단별 보호선수 명단 제외자 중 1명씩 고를 수 있다.
만약 최희섭이 KIA의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됐다면 kt로 갈 수도 있다. kt에는 최희섭이 가장 빼어난 활약을 펼쳤던 시절의 은사인 조범현 전 KIA 감독이 초대 사령탑으로 있다. 조 감독과 재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희섭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는 "일단 중요한 건 지금 현재는 내가 KIA 타이거즈의 선수라는 것이다.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하지만 프로는 냉정하다. 내가 다른 팀으로 가게될 수도 있다. 그래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선수는 어디서든 야구를 해야만 한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늘 최선을 다하겠다'는 게 내 원칙이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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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가세 정상의 전망대에 오른 최희섭은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 오면 그냥 기분이 편하고 좋다. 한국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조범현 감독 시절 KIA는 이곳 미야자키 휴가시에서 마무리캠프와 스프링캠프를 치렀다. 그리고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일궈냈다. 그때의 추억이 최희섭의 머릿속에서 오버랩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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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섭은 조용히 종을 쳤다. 그리고 십자가의 바다를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 "2009년 캠프 때 '꼭 우승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 적이 있다. 그해 진짜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고 이 곳은 내게 신성한 장소가 됐다. 이번에도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 자세한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KIA가 2009년 당시처럼 강한 팀이 되게 해달라는 기원은 잊지 않았다"고 밝혔다.
최희섭의 개인적인 소원. 아마도 '명예로운 부활'일 가능성이 크다. 매일같이 '기적'을 느끼며 야구를 되찾은 최희섭의 소원이 과연 이뤄지게 될 지 기대된다.
휴가(일본 미야자키현)=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