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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감추던 무기, 생갭다 위력적이다. 류현진의 슬라이더는 밋밋하지 않았다. 초구부터 적극적인 승부를 펼친 것도 주효했다.
메이저리그 데뷔 후 최다 이닝, 최다 투구다. 기존엔 6⅓이닝(3일 샌프란시스코전, 8일 피츠버그전)이 최다이닝이었고, 14일 애리조나전의 107개가 최다 투구수였다. 다섯번째 선발등판에서 최고의 피칭을 펼쳤다. 처음으로 7이닝을 소화하면서 퀄리티스타트 플러스(7이닝 이상 투구 3자책점 이하)를 기록했다.
아이크 데이비스 지독하게 괴롭힌 슬라이더, 짜증낼 만 했다
처음엔 직구가 기본이었지만, 타순이 한 바퀴를 돈 뒤에는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이었다. 우타자 상대로는 체인지업, 좌타자 상대로는 슬라이더가 결정구였다. 이날 직구도 좋았지만 슬라이더도 돋보였다. 서클체인지업이야 류현진이 전매특허라 치더라도, 슬라이더는 국내에서도 정상급이 아니라고 평가받던 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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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회 1실점한 뒤 계속된 2사 1,3루서 만난 데이비스. 류현진은 또다시 슬라이더만 연달아 3개를 던져 볼카운트 1B2S를 만들었다. 다음 공은 '역'으로 갔다. 바깥쪽으로 92마일(148㎞)짜리 직구를 꽂았다. 이날 최고구속. 데이비스는 파울팁 삼진을 당한 뒤 방망이를 덕아웃 쪽으로 집어 던졌다. 류현진에게 완벽히 농락당한 데이비스였다.
류현진은 그동안 슬라이더를 꽁꽁 감추고 있었다. 이유는 뭘까. 다저스는 류현진 영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류현진의 슬라이더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단독으로 결정구가 되긴 어려워도, 다른 공과 함께 쓰인다면 충분히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류현진은 국내에서부터 스프링캠프 땐 슬라이더를 꺼내지 않았다. 데뷔 후 계속 같은 패턴이었다. 정규시즌 개막을 2주 가량 앞두고 던지기 시작하는 정도였다. 국내로 치면, 시범경기 막판이다.
메이저리그에선 생갭다 빨리 슬라이더를 꺼냈다. '통할까?'라는 생각이 앞서 테스트 차원에서 던진 공이었다. 지난달 2일 LA에인절스와의 시범경기였다. 처음 던진 슬라이더, 류현진은 그 공으로 조시 해밀턴에게 홈런포를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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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캠프 때 만난 류현진은 "슬라이더는 팔꿈치에 무리가 가는 구종이다. 예전에 수술을 받아서인지 그동안 슬라이더는 가장 마지막에 던지는 공이었다"고 말했다.
고교 시절 받은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토미 존 서저리) 탓에 슬라이더가 봉인돼 있던 것. 류현진은 매년 몸을 충분히 만든 다음에 슬라이더를 던진다. 그게 그만의 '루틴'이다. 자신의 팔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인 셈이다.
초구 스트라이크, 기선제압의 표본
류현진은 이날 공격적인 피칭도 선보였다. 바로 '초구 스트라이크'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공을 던졌다. 카운트를 잡으려 들어간 쉬운 공이 아니었다. 오히려 힘이 있었다.
류현진은 지난 21일 볼티모어전에선 초구 때문에 고전한 바 있다. 볼티모어 타선은 류현진의 앞선 세 차례의 등판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나왔다. 카운트를 잡기 위해 들어간 공을 손쉽게 쳐냈다.
그날의 교훈이 약이 됐을까. 이날 만큼은 초구가 무기였다. 총 27타자 중 20차례나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초구 스트라이크의 비율이 무려 74%나 됐다.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는 패턴도 눈에 띄었다. 상대를 유린하는 볼배합이었다. 초반엔 주로 직구로 카운트를 잡았다. 반면 한 바퀴를 돈 뒤엔, 상대가 직구를 노릴 것을 감안해 초구로 변화구를 선택했다.
말로 설명하면 쉬워 보이지만, 상대가 대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영리한 볼배합이었다. 좋아진 슬라이더를 기반으로 훌륭한 패턴을 만들었다. 적극적인 피칭까지 이어지니 흠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시즌 3승에는 실패했지만, 한 단계 더 발전한 류현진을 발견한 경기였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