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천만원짜리 대주자 강명구의 존재감

노재형 기자

기사입력 2012-10-24 21:54


삼성 이승엽이 7회말 배영섭의 2루 내야안타때 3루를 돌아 홈까지 파고들고 있다. 대구=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21세기는 '스페셜리스트'가 대접받는 시대다.

야구에도 팀마다 스페셜리스트가 존재한다. 투수의 경우 왼손타자를 전문으로 상대하는 왼손 스페셜리스트가 있고, 야수들은 대타, 대수비, 대주자 등의 용도로 스페셜리스트 역할을 한다.

이들은 주전이 아닌 까닭으로 매번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하지만, 승부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는 주인공 못지않은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삼성 강명구(32)는 평생 대주자 전문으로 활약해 왔다. 지난 2003년 입단해 지금까지 철저히 대주자로만 존재감을 보였다.

8개팀 전체 선수들 가운데 스피드만 놓고 볼 때 '둘째 가라면 서러운' 선수가 강명구다. 2008년 상무 입대 당시 받은 체력 검사에서는 100m를 11초7에 주파했다. 물론 삼성 1군 내에서는 가장 빠른 발을 지녔다. 그런데 대주자 전문 강명구의 올해 연봉은 6000만원이다. 지난해 5300만원에서 700만원이 인상된 금액이다. 올시즌 NC를 포함한 프로야구 전체 선수들의 평균연봉은 9441만원이다. 강명구의 연봉이 평균연봉보다 약 3400만원이나 적다. 평균 연봉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강명구의 연봉은 적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타격과 수비가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야구에서 오로지 '대주자'라는 한 가지 역할만 수행한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그리 적은 금액도 아니다. 강명구는 철저한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무장해 묵묵히 자기 역할을 소화하고 있다. 오로지 대주자 하나만 하는 선수에게 주는 6000만원이라는 연봉이 강명구의 가치를 대변해주고 있다.

역할적인 측면에서 대주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홈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이 부분의 1인자가 바로 강명구라는 의미다. 대주자 요원은 빠른 발과 뛰어난 주루 센스가 기본 자질이다. 덧붙여 과감한 판단과 열정적인 허슬플레이도 마다해서는 안된다. '6000만원짜리 대주자' 강명구의 진가가 24일 대구에서 열린 SK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강명구는 팀이 2-1로 1점 앞서 있던 7회말 출전했다. 선두타자로 나가 좌중간 안타를 친 이지영의 1루 대주자로 그라운드를 밟았다. 이어 김상수의 1루수쪽 희생번트 때 여유있게 2루까지 진루했다. 강명구의 존재감이 빛을 발한 것은 1번 배영섭의 내야안타 때였다. 배영섭은 SK 윤희상으로부터 투수 쪽으로 크게 바운드되는 땅볼을 쳤다. 타구는 투수 키를 넘어 중견수 쪽으로 흘렀다. 이때 SK 2루수 정근우가 유격수쪽까지 달려가 공을 낚아챘다. 명백한 중전안타성 타구를 건져낸 것까지는 정근우의 엄청난 호수비였다.

2루주자 강명구는 재빨리 3루까지 달려갔다. 그런데 홈대시를 저지하는 김재걸 3루코치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3루를 밟은 후 베이스로부터 2m 정도의 거리에서 잠시 멈칫했다. 주자가 주루코치와 부딪힐 경우, 베이스러닝 규칙상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주루를 했다는 이유로 아웃 판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강명구는 달려가는 속도를 죽이고 3루 근처에서 숨을 죽였다.


이때 정근우는 강명구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공을 들고 송구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강명구가 홈으로 달려가면 홈으로 공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잠시 멈춰 선듯 했던 강명구는 정근우가 송구 방향을 정하지 못한 사이 다시 홈으로 전력질주를 시도했다. 그제서야 정근우는 3루 오버런을 한 강명구를 잡기 위해 3루수 최 정에게 송구했다. 여기에서 최 정의 실수가 나왔다. 강명구가 3루로 귀루할 것이라고 판단한 최 정은 공을 받은 후 홈은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3루를 내려다봤다. 뒤늦게 강명구의 홈대시를 본 최 정이 포수 조인성에 송구했지만, 슬라이딩을 한 강명구의 왼손이 먼저 홈에 닿았다. 이때 강명구의 슬라이딩에서도 '스페셜리스트'의 냄새가 물씬 났다. 홈플레이트를 밟고 선 포수 조인성의 발 뒷꿈치가 살짝 들린 틈새로 절묘하게 왼손바닥을 집어넣으며 홈플레이트를 찍었다.

강명구는 자신의 앞을 막아선 김재걸 3루코치를 피해 달려버렸다. 엄밀히 말해 '항명'을 한 셈이다. 하지만 삼성을 웃게 한 '항명'이자, 대성공을 거둔 '쿠데타'였다.

강명구는 야구선수의 기본인 타격과 수비로 팀에서 거의 하는 게 없다. 그러나 삼성은 그런 강명구를 9년째 품고 있다. 그 이유가 24일 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또렷이 드러났다.
대구=노재형 기자 jhno@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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