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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최동원시대 강타자 10인, "내 기억속 최동원은..."

신창범 기자

기사입력 2011-09-28 20:50 | 최종수정 2011-09-29 11:29


야구팬들의 가슴 속에 고 최동원 한화 2군감독은 영웅이고, 전설이다.

영웅은 떠났지만 가슴속에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은 이들을 위해 롯데가 추모 행사를 마련한다. 일명 '최동원 데이'다. 롯데는 30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벌어지는 두산전에 앞서 현역 시절 고인의 등번호인 11번에 대한 영구 결번식을 연다. 사직구장 외야 펜스엔 11번이 새겨진 유니폼과 영구 결번 조형물이 설치된다. 또 이날 경기 시구자로 고인의 장남인 기호씨가 나선다.

팬들 보다 고인을 더욱 애절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만날 때마다 높은 벽처럼 느껴졌던 투수 최동원을 넘기 위해 그의 공 하나하나에 목숨 걸었던 그 시대의 강타자들. 그들의 머릿속에 투수 최동원은 어떤 존재로 각인돼 있을까. '최동원 데이'를 맞아 프로야구 왕년의 강타자 출신 10인이 최동원에 관한 그들만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김봉연

언젠가 광주경기였다. 지고 있었는데 최동원이 눈짓으로 바깥쪽-몸쪽-바깥쪽-몸쪽 높은 거, 이런 식으로 던지겠다고 하더라. 설마 했는데 정말 그렇게 들어왔다. 마지막 몸쪽 높은 게 들어왔는데 마침 적당한 높이였다. 3루쪽으로 빠지는 안타를 쳤다. 1루에 나갔더니 최동원이 나를 보며 박수를 쳐주더라. '역시 잘 치십니다'라는 눈짓도 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자기 공에 자신감이 넘쳤다. 안타를 맞아도 다음 타자 잡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또 한번은 사직구장에서였는데 큰 타구가 펜스 위를 맞고 튀어나왔다. 2루에 안착해 발 보호대를 벗고 있는데 나를 보면서 '넘어갔어야 됐는데 안 넘어가서 아깝다'는 표정을 짓더라. 그만큼 마운드에서 여유가 넘쳤다. 최동원의 공은 볼끝이 너무 좋았다. 솟아오르는 것 같아서 정말 치기 힘들었다.

윤동균

실업야구 시절인 1980년쯤 나는 포항제철 소속, 최동원은 롯데(아마추어) 소속으로 만났다.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린 경기서 최동원을 상대로 밀어서 홈런을 쳤다. 분명 폴대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부산 관중도 많고 해서 그런지 심판이 파울을 선언했다. 항의를 강하게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최동원을 상대로 친 유일한 홈런이었는데 아쉬웠다. 다시 타석에 서서 볼넷을 골라나갔다. 그런데 최동원이 연속으로 3번이나 강하게 견제를 했다. 그냥 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잡아내겠다는 듯 시퍼런 눈빛이었다. 대선배가 아깝게 홈런을 놓치고 1루에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강한 견제를 던지는 모습을 보고 배짱 정말 좋다 생각했다. 최동원 입장에선 볼넷을 내준게 못내 억울했던 모양이었다. 난 그 이후로 최동원을 상대로 홈런을 치지 못했다.

김재박

지난 77년 백호기 대회때 최동원을 처음 봤다. 대학 1학년인 최동원은 첫 인상부터 대단했다. 공이 빠른데다 제구력까지 완벽했다. 이런 투수와는 승부를 길게 가져 가면 타자가 절대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구부터 공격적으로 나갔다. 배트도 더 짧게 잡았다. 빠른 공을 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안타를 하나 친 것 같은데 1루에서 보니 투구폼이 커 도루를 하기엔 편했다. 대단한 투수였지만 폼이 큰 것은 약점이었다.

김성한

80년대 내가 한창 잘 하고 있을 때 부산 구덕구장이었다. 워낙 공이 빠르고 커브도 좋았기 때문에 치기 힘들다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타자들이 타석에서 최동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다. 이번에는 몸쪽 공을 밀어치겠다고 생각하고 크로스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적극적으로 친다고 하다가 배트를 내미는 순간 공에 왼쪽 팔목을 맞았다. 빠른 볼에 데드볼을 맞은 것이었다. 1루로 걸어가서 주자 플레이를 하려는데 그제서야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병원 가서 X레이를 찍어보니 손목에 금이 간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얼마나 최동원과의 대결에 신경을 썼으면 뼈에 금이 가 아픈줄도 모르고 통증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깁스를 하고 3~4주 정도 재활을 했다. 그만큼 공이 워낙 빨랐고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최동원은 빠른 볼 뿐만 아니라 낙차 큰 커브, 경기운영 등 모든 것이 최고였다.

이종도

구질이 다양했다. 직구도 바깥쪽은 휘어져 나가고, 안쪽으로는 휘어들어와서 치기가 힘들었다. 실업팀 제일은행에서 뛸 때 롯에에서 뛰던 최동원과 자주 만났는데 정말 변화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도저히 못 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변화구는 포기하고 직구 하나만 노리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마저도 치기 힘들었다. 폼까지 다이나믹해서 정말 위력적이었다. 타석에 설때는 정말 이런 공을 어떻게 치나싶었다.

장태수 삼성 수석코치(한국시리즈 마지막 타자. 동기생)

=역전당하고 난 뒤에 어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풀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만 노리고 들어갔는데 몸쪽으로 떠오르는 볼에 삼진을 당했다. 고교 시절부터 난 최동원 감독과 대결을 많이 했다. 최동원이야말로 A클래스였다. 지금 좋은 투수라고 하는 윤석민? 그때 시절의 최동원과 같은 힘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투수들을 관리도 해주는데, 그때는 관리 같은 것도 없던 시절이다. 고교때 대구에서 경기를 하는데 연장전을 던지고 다음날 또 나오더라.

김성래 삼성 타격코치(연세대 후배)

동원이형이 4학년 때 내가 1학년이었다. 그때 우리 연세대 타자들은 모든 경기에서 매 타석 홈런 스윙을 했다. 마치 올스타전 홈런더비 같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린 1점만 내면 이긴다는 생각이었다. 최동원이 있기 때문이다. 동원이형은 대학 때가 가장 구위가 좋았다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와일드한 투구폼에, 위에서 찍어버리지 않는가. 무시무시했다.

김용국 삼성 수비코치

내가 프로 데뷔 첫해에 동원이형 처음 상대해서 2루타를 연속으로 쳤다. 그랬더니 다음날 1번 타자를 시키더라. 동원이형 공에 등짝을 맞아본 적도 있는데 정말 아팠다. 그 시절에 야수들조차 동원이형의 투구폼을 흉내내곤 했다. 동원이형 구위가 워낙 좋으니, 야수들도 동원이형 폼을 따라하면 송구가 좋아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만수 SK 감독대행

최동원의 최전성기는 연세대 2, 3학년 때였다. 그 당시 볼은 정말 대단했다. 특히 그의 드롭성 커브에 대한 기억이 강렬하다. 동기였던 우리는 대학 대표팀에 뽑혀 국제대회에 나가곤 했다. 당시 내가 동원이의 볼을 받았는데. 이런, 처음에는 적응할 수가 없었다. 너무 낙차가 커서 항상 대표팀 소집 초반에는 동원이의 볼을 포구하기 위해 너무나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소집 초반에는 커브를 잡지 못해 많이 놓쳤다. 일정 정도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당시 동원이는 팔을 오랫동안 풀었다. 롱토스를 많이 했는데, 경기 전 한 80개 정도 했다. 나도 어깨가 괜찮은 편인데, 항상 내가 먼저 어깨가 아파서 "동원아 그만하자"라고 말했다. 그만큼 동원이가 많은 훈련을 통해 어깨를 강하게 했다는 측면도 있지만, 당시 비과학적인 시스템으로 인해 동원이의 선수생명이 단축된 게 아닌가 싶다.

동원이와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동원이의 볼을 받아봤기 때문에 프로에 들어와 맞대결에서 좀 더 나았다. 당시 동원이의 볼은 칠 수 있는 공이 아니었다. (이만수 감독과 고 최동원 2군 감독의 프로통산 맞대결 전적은 2할1푼8리. 55타수 12안타)

프로에서는 당한 기억밖에 없다. 그는 매우 공격적이다. 특히 몸쪽 공은 무시무시했다. 사실 동원이의 공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타석 안쪽으로 바짝 다가서 있어야 했다. 홈 플레이를 워낙 넓게 활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몸쪽 직구를 연달아 꽂은 뒤, 바깥쪽 커브로 삼진을 뺏거나 범타로 처리하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타석에 바짝 붙을 수 없었다. 몸쪽 위협구가 대단했고, 몸에 맞으면 정말 너무 아팠다. 그 이후로 마음은 (타석에) 붙어라 붙어라 하는데, 발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과는 매번 삼진이었다. 하하(최동원과의 맞대결에서 삼진 9개)

한대화 한화 감독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에피소드는 없다. 하지만 현역시절 최동원 형이 선발로 나오는 날이면 항상 가슴 졸였던 기억이 있다. 동원이 형과의 상대에서 타율이 크게 저조했기 때문이다. 특히 해태 시절 우리 팀에는 선동열 삼성 운영위원이 있었기 때문에 둘이 맞붙는 날이면 타자들도 비상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선동열의 승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타자들이 분발하자고 다짐했지만 번번이 최동원 앞에서 1, 2점을 내기가 힘들었다. 나는 원래 방망이 끝에서 두 손가락 너비 정도를 띄워놓고 잡는 편인데 최동원 선배를 상대할 때면 항상 그 보다 더 짧게 잡았던 기억이 있다. 아래로 떨어지는 커브가 워낙 위력적이어서 맞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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