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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수가 아니라고? 모르는 이야기!
김 감독이 대구상고 2학년때 이 감독이 입학했다. 당시 뚜렷한 인상은 없다. 이 감독이 1학년이라 주전포수도 아니었고, 중학교때까지는 투수를 했었다. 2학년이 돼서 안방을 책임졌다. 김 감독은 "목소리 크고 화이팅 외치는 건 그 때도 주종목이었다"고 웃었다. 그러면서 "훈련하고 노력하는 열정은 내가 아는한 최고다. 누구도 이 감독만큼 노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 감독이 평생 은인?
80년 일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당시 국가대표 명단에 김 감독이 포함됐다. 하지만 어깨부상으로 출국전날 명단에서 제외됐다. 대타가 이 감독이었다.
그 때 이 감독은 일본 오사카에 있었다. 대학춘계리그에서 우승, 일본 긴키대와의 친선경기를 위해 나가있었다. 다른 선수를 포함시키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코칭스태프는 그냥 현지에 있는 이 감독을 합류시키기로 했다. 그 대회에서 한국은 준우승을 했다. 이 감독은 대타로 한번 출전, 번트를 댄 게 활약의 전부다. 그 대회가 행운이었다. 나중에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는 대회로 분류됐다. 이에 대해 이 감독이 김 감독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을까. 김 감독은 "그런 건 없었다. 내가 말을 꺼내 본 적도 없다"며 웃었다. 김 감독은 그해 자원 입대를 했었다.
투수는 포수가 만든다
현역시절, 이 감독은 홈런을 친 뒤 두팔을 들고 깡충깡충 뛰면서 베이스를 돈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홈런 맞은 투수를 자극할수 있는 행동이었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일단 웃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번 이야기했다. 투수를 자극할 수 있으니 자제하라고 했더니 조금 덜하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성격이 어디 가겠나. 홈런친 다음 타석에서 여러번 사구가 나왔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김 감독에게 이 감독은 어떤 존재일까. 김 감독은 "훌륭한 포수 1명이 좋은 투수 10명을 만든다"고 했다. 김 감독의 야구인생에 있어서 이 감독도 마찬가지였단다. 김 감독은 "내가 프로에서 그만큼 성적을 올릴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다. 이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한편 김 감독은 레전드 투수부문 5위에 올랐다.
신보순 기자 bsshi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