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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그 인물의 이면을 보려고 노력합니다. 껍데기만 보면 그 인물은 한 없이 작아질 뿐입니다."
KBS2 '공주의 남자' 속 수양대군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식을 향한 부성애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피붙이마저도 제거할 수 있는 교활함과 잔인함을 오가는 인물이다.
김영철은 이 복잡미묘한 수양대군의 심리를 너무나도 훌륭히 소화해내며 시청자들의 찬사를 이끌어냈다.
'공주의 남자'는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좌의정 김종서 등을 살해한 사건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을 배경으로, 수양의 딸 세령(문채원)과 김종서의 아들 승유(박시후)가 서로 사랑을 하게 된다는 내용의 창작이 가미된 팩션 사극이다.
방송 초반 김영철은 김종서 역을 맡은 선배 연기자 이순재와 함께 살벌한 정치싸움을 그려냈다. 문종(정동환)의 죽음으로 수양과 김종서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김영철의 명연기가 빛을 발했다. "김종서. 그리 원한다면 이 손으로 죽여드리지..."라는 김영철의 대사와 두 자녀의 포옹장면이 오버랩되는 엔딩은 시청자들에게 섬뜩함을 안기기까지 했다.
많은 명장면을 탄생시켰지만 김영철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수양대군이 왕좌에 오른 뒤 수하 사람들과 술자리를 갖던 순간이었다. 수양의 이면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수양이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를 봐야했던 지난 과정을 생각하며 회한에 잠기는 모습을 연기할 때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더라구요.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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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이 처음에는 사극 대사를 소화하기 어려워 했어요. 가령 '여기 커피 좀 주세요'라는 대사가 있다면 머뭇거리다가 '주세요'만 하는 식이었죠.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와 비슷한 실수인 셈이죠. 감정으로 동화되면 대사는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마련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걸 알아가더라고요. 이제는 감정을 쏟으니까 대사가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그는 "(문)채원이가 스스로 고민하고 캐릭터에 동화되면서 나온 결과물이지 대사 몇 군데 손 봐준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후배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공주의 남자'는 베테랑 연기자들이 그려내는 정치적 대결과 박시후와 문채원을 중심으로 한 로맨스가 접목된 독특한 형식의 사극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칫 감정 몰입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선배 연기자들이 대사 톤을 바꾸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김영철은 "정치 얘기만 나오면 드라마가 자칫 무거워 질 수 있다. '공주의 남자'가 인기를 얻은 데에는 분명 젊은 연기자들의 사랑 이야기가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면서 "선배들이 너무 정통 사극 톤으로 대사를 읊으면 젊은이들의 이야기와 동떨어져 보일 수 있을 것 같아 현대적인 맛을 살릴 수 있게 대사를 조금 수정해 연기했다"고 말했다.
김영철은 '야인시대' 김두한, '아이리스' 백산 등 그동안 강렬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캐릭터를 맡아 선굵은 연기를 선보여왔다. 그 가운데서도 KBS1 대하사극 '태조왕건'의 궁예 역은 지금까지도 그를 대표하는 캐릭터로 인식되고 있다. 그는 그러나 "궁예라는 인물로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지만 아직까지도 그 인물로 각인되고 있는데 대해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때도 있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수많은 작품에서 명연기를 펼쳤던 그이지만 영화 '달콤한 인생'과 1996년 방송된 드라마 '머나먼 나라'가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김민종, 김희선 등과 함께 출연했던 '머나먼 나라' 촬영 때 갑상선 이상으로 몸무게가 15kg이나 빠져서 너무 힘들었어요. 당시 40대 중반이었는데 지금의 제 나이대 인물을 연기했죠. 다리를 절뚝거리며 길거리에서 담배꽁초를 주워서 피우고, 가게에서 사과 같은 걸 훔쳐 먹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역할이었어요. 이상하게도 그 작품이 지금도 아련하게 떠올라요."
그렇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이제 그 누구도 대체하기 어려운 최고의 카리스마 연기로 수양대군을 재탄생시킨 '공주의 남자'가 그의 대표작으로 각인될 것으로 보인다.
김명은 기자 dram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