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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붙는데는 조건이 있다. 가연성 물질과 산소, 발화점 이상의 온도 등….
심증이 있지만 물증이 없는 빈볼. 심증이 있다면 대부분 빈볼이다.
'타자는 직감으로 안다'고 한다.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베테랑 타자일 수록 그렇다. 백전노장 진갑용이 발끈한 이유다.
상황을 보자. KIA 벤치의 스트레스 지수가 높았던 경기였다. 참 안풀린 날이었다. 에이스 윤석민이 조기 강판됐다. 비로 오랜만에 치른 에이스 등판 경기라 필승의지로 임한 경기였다.
설상가상으로 주력 선수가 경기 중 물리적 충돌로 빠졌다. 4회 김선빈이 홈으로 쇄도하다 진갑용이 블로킹한 무릎에 얼굴을 부딪히며 코뼈를 다쳤다. 경기에서 빠졌다. 김선빈은 현재 KIA의 핵심 타자다.
2점 지는 상황에서 불펜 에이스 박지훈까지 투입하며 안간힘을 써봤지만 최형우에게 쐐기 3점홈런을 맞았다. 홈런 직후 초구에 진갑용의 왼쪽 어깨로 공이 날아왔으니 진갑용으로선 충분히 빈볼이라 느낄만 했다. 진갑용은 2회 선제 홈런까지 날렸다.
선-후배 문화
김태균-김성배, 나지완-김현수 사건 등 올시즌 유독 자주 언급되는 선-후배 문화. 풀이 좁은 한국야구에서 피할 수 없는 '동방예의지국'의 굴레다. 이번 사건도 관계가 있었다. 통상 빈볼 시비가 촉발되는 배경 중 하나는 선-후배 문화다. 고의성이 있다고 생각될 경우 통상 선배는 분을 참지 않는다. 감정 표현을 한다. 진갑용(38)-박지훈(23)처럼 어마어마한 차이의 선후배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만약 같은 상황이 고참 투수-신참 타자 간에 벌어졌다면? 벤치 클리어링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타자는 기분이 나빠도 그냥 꾹 참고 넘어갈 가능성이 더 크다. 욕을 하고 달려들기엔 너무나 대선배이기 때문이다. 물론 후배라도 해당 타자의 성향에 따라 '무표정-기분 나쁜 표정-항의' 등 대응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타자가 선배일 경우 빈볼 시비와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는 점이다. 2006년 7월 현대 김동수-한화 안영명 사건, 2007년 두산 안경현-LG 봉중근 사건도 대선배 타자와 까마득한 후배 투수 간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투수의 제구력
투수의 제구력도 빈볼 시비에 영향을 미친다. 평소 어디로 들어올지 모르는 공을 던지는 들쑥날쑥한 제구의 소유자라면 시비가 덜하다. 고의성 여부가 헷갈리는데다 심지어 적시에 맞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두산 이혜천을 상대하는 왼손 타자는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위축된다고 증언한다. 이혜천의 강점이기도 했다. 빈볼 시비 오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도 하다.
반면, 제구력이 좋을수록 시비가 붙을 가능성이 높다. '평소 정확하게 던지던 투수가 갑자기 저렇게까지 공이 빠지기 힘들다'는 타자들의 생각이 시비로 이어진다. KIA 박지훈도 제구력이 좋은 투수다. 이닝당 4사구가 0.5개에도 미치지 않는다. 물론 이날은 예외일 수도 있었다. 비로 오랜만의 등판이라 제구가 흔들렸을 수도 있다. 앞서 박석민에게도 사구를 허용했다. 하지만 최형우에게 홈런을 내준 직후 날아온 터무니 없이 빠진 몸에 맞는 공이라 진갑용으로선 빈볼로 느낄만 했다.
한화 송신영은 지난 20일 SK전 빈볼 시건으로 KBO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지난 2006, 2009년 빈볼 투구에 대한 가중처벌로 200만원의 벌금에 5경기 출전정지 조치까지 받았다. 송신영 역시 승부욕이 강하고 제구가 좋아 빈볼 시비가 잦은 투수 중 하나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