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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술집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펜싱을 놓으려 했던 적도 있었다."
허 준의 은메달은 값지다. 신체적 조건, 어려운 환경 등 수많은 시련과 '진검승부'해 마침내 얻어낸 '인간승리'의 결실이다. 서연중 시절, 학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실패, 부모님의 이혼은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다. 희망 없이 막연히 백댄서를 꿈꾸던 소년,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꽉 붙잡아준 건 펜싱이었다. 유난히 빠른 발을 가진 소년은 펜싱을 시작한 지 1년만인 중학교 3학년때 중고펜싱연맹회장배, 중고연맹펜싱선수권 등 국내대회 3관왕을 휩쓸었다. 소년체전에서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탁월한 재능으로 최고의 자리에 섰다. 서울체고 졸업후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고낙춘 감독이 이끄는 '플뢰레 최강' 대구대에 진학했다. 호랑이 감독의 지도 아래 기량이 일취월장했다.작은 키를 극복하기 위해 남들이 5번 움직일 때 10번, 15번씩 움직여야 했다. 많이 움직일 수 있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선 웨이트트레이닝 등 훈련량도 몇 배로 가져가야 했다. 스파르타 훈련을 견디다 못해 고 감독 몰래 도망을 간 일도 있었다. 허 준은 "대학교 2학년때 너무 힘들어 운동을 그만둘 생각을 했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 계속 펜싱을 해야하나 고민했다"고 했다. 술집 아르바이트, 야간작업 등 돈 되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았다.
허 준은 펜싱을 애써 외면했지만, 펜싱은 허 준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의 재능을 아낀 선배들이 일터로 찾아와 설득했다.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고 감독은 돌아온 제자를 말없이 받아안았다. 다시 돌아온 피스트는 따뜻했다. 깊은 방황 후 허 준은 더 강해졌다. 펜싱에 인생을 걸었다. 오른발에 고질병인 족저근막염을 앓으면서도 한시도 훈련을 쉬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로러스펜싱클럽에 입단하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자펜싱 최초의 금메달리스트 김영호 감독을 스승으로 만났다. 챔피언의 기술을 전수받으며 눈부신 상승세를 이어갔다. 대표팀에서 고진 남자플뢰레 코치의 지도 아래 햄스트링 부상이 올 만큼 치열하게 훈련했다. 안방에서 펼쳐진 인천아시안게임, 허 준은 또 한단계 성장했다. 당당히 결승에 진출해 세계1위 마진페이와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다시금 존재감을 입증했다. 개인전의 아쉬움을 단체전에선 기필코 풀 생각이다. 2개월전 수원아시아선수권에선 개인전 금메달을 딴 직후 체력난조를 보이며 단체전 금메달을 놓쳤다. "단체전에선 그냥 피스트에서 죽으려고요. 마지막이니깐요." 단체전 금메달은 반드시 이뤄야 할 숙제이자 꿈이다. 이제 그의 시선은 아시아에 머물러 있지 않다. 2년후 리우올림픽을 정조준했다. "올림픽에 나가 개인전이나 단체전에서 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꿈이다. 메달색에 연연하지 않고 올림픽 메달을 획득하는 것이 내 펜싱 최대의 목표"라며 웃었다. 인천=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