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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소치동계올림픽이 개막하던 날, '대한민국 쇼트트랙 에이스' 고(故) 노진규는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어깨에 13㎝ 혹을 매달고도 올림픽의 꿈을 놓지 않았던 '빙상천재'는 원자력병원 병실에서 동료들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지켜보며 응원했다. 누나 노선영의 스피드스케이팅 3000m 경기를 기다리다 중계가 없다는 사실에 낙담, TV를 꺼버렸다.
8조까지 경기를 마친 후 정빙 시간을 거쳐 14조까지 경기가 이어진다. 세계 스피드스케이팅 팬들의 시선은 14조에서 맞대결을 펼칠 '월드컵 랭킹 1위' 다카기 미호(일본)와 '세계기록 보유자' 헤더 베르그스마(미국)의 금메달 대결에 쏠렸지만 대한미국 안방 팬들의 시선은 노선영에게 쏠렸다.
평창 스타트라인에 서기까지 곡절이 많았다. 대한빙상연맹의 행정 착오로 선수 등록에 문제가 생겼다. 태릉선수촌에서 눈물을 흘리며 나홀로 짐을 쌌다. 이튿날 도핑 징계로 인해 러시아 선수의 출전이 불발되며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엔트리가 번복됐다. 김상항 대한빙상연맹 회장이 직접 그녀를 찾아 사과했다. 어렵게 마음을 돌렸다. "많은 분들의 바람 덕분인지 저에게 기적처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정말 많은 고민 끝에 저는 당당하게 올림픽에 출전해 최선을 다하고 후회 없이 대표 생활을 마무리하려 합니다"라는 글로 평창 도전을 선언했다.
11살 때 과천빙상장에서 취미로 스케이트를 시작한 노선영은 불과 4년만인 15세에 태극마크를 달았다. 노선영이 선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 '사건'이다. 2008~2009시즌 여자 1500m 대표선발전에서 2분05초, 쟁쟁한 언니들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아시안게임에선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목에 걸었다. 세 살 아래 동생 고 노진규는 국가대표 누나를 보며 꿈을 키웠고, 세계선수권 금메달도 따냈다.
올림피언으로서 노선영은 한결같았다. 열일곱살이던 2006년 토리노올림픽 첫출전부터 2010년 밴쿠버, 2014년 소치, 그리고 평창까지 지독한 훈련과 기나긴 여정을 꿋꿋이 버텨왔다. '항상 성실히 스피드스케이팅을 해왔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던 바람대로였다. 동생이 떠난 빈자리, 평창에서 그녀는 4번째 올림픽의 약속을 기어이 지켜냈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강릉=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