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현장르포] 범죄, 섹스, 그리고 DNA
기사입력 2000년 04월 17일 14시 54분
"이 아이가 제 아이 맞습니까?"
무너진 사회의 성 기강 탓일까.
태어난 아기의 친 아버지를 의심하는 시비의 목소리들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지난 한해 동안 서울 가정법원에 접수된 친생자관계 전부확인소송은 무려 664건. 월 50건이 넘는다.
또 아이를 둘러싼 시비를 가려달라며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을 두드린 숫자도 200건이 넘었다. 지난 95년 100여건이었던 조사 의뢰가 매년 상승곡선을 그린 결과다.
DNA 분석법은 기존의 혈액형 분석법에 비해 한걸음 나간 정확도로 이들의 의혹을 해결해주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는 방대한 DNA 연구의 일부분일뿐.
미국 정부를 중심으로 한 유전공학자들은 지난 90년, 2005년 완성을 목표로 범 세계적 프로젝트 `게놈 프로젝트(genome project)'의 조기 완성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지난 7일, 미국의 생명공학업체 셀레라 제노믹스사가 "인간의 유전자 복원을 위한 중요한 첫 단계를 넘어섰다"고 발표, 게놈 프로젝트를 추월할지도 모른다는 폭탄 선언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렇게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는 첨단 DNA 연구 결과가 우리 사회에서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봤다.
■불신(不信)의 성문화.
취재진은 어떤 사람들이 친자확인을 원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서울대 부속병원 내 법의학교실을 찾았다. 이정빈 교수가 이날 취재진에게 들려준 사례들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것들.
지난해 어느날, 이교수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30대 남자는 한참을 주저주저하더니 어렵게 말문을 꺼냈다.
"저…, 이런 것도 혹시 확인할 수 있을지…."
그는 가져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들었다. 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는 여성용 팬티였다.
"제 집사람이 아무래도 수상해서…."
그가 꺼낸 것은 아내의 팬티. 그 팬티에 묻은 정액이 과연 자신의 것인지 확인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교수는 멀쩡하게 생긴 남자가 여성용 팬티를 들고 더듬더듬 말하는 품에 웃음이 터져나오려고 했지만 그 남성만큼은 진지했다.
또다른 40대의 여성은 한주먹의 휴지뭉치를 들고 있었다. "남편의 차에서 나온 건데…."
그녀는 남편이 차에서 다른 여자와 성관계를 가진 것 같다며 휴지에 혹시 다른 여성의 체액이 묻어있는지 조사해달라고 요청해 연구원들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했다.
■위험한 세태
`준비 없는 성생활'이 남긴 사연은 수도 없이 많다.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S씨(38)는 최근 한 여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3개월 전쯤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만나 `진한 밤'을 함께 보낸 여자. 다짜고짜 그녀는 "임신이 되었으니 책임지라"는 말을 던졌다.
그러나 S씨는 이미 두 아이를 두고 1년 전 정관수술을 마친 상태. S씨가 조용히 "사람 잘못봤어. 나, 묶었어"라고 말하자 여자는 잠시동안 머뭇거리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S씨는 "가끔 돈을 노리고 사람의 약점을 파고 드는 꽃뱀들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닥칠줄은 몰랐다"며 "수술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당히 난감했을 것"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직 종사자 K씨(35)는 독신. 그는 1년 전 하룻밤을 함께 지낸 뒤 아무런 소식이 없던 여자로부터 연락을 받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2개월 전 아이를 낳았고 아기의 생부가 K씨라고 주장하며 "너무 늦게 말해 미안하다. 당신의 아이를 꼭 낳고 싶었다. 아들이니 결혼해달라"고 주장했다.
K씨는 "말도 안된다"며 친자 확인을 의뢰했으나 결과는 그가 친부라는 것. K씨는 "어떻게 아이의 장래를 걸고 이런 짓을 할수 있느냐"며 격분하고 있었다.
■조사기관을 찾는 사람들
국내에서 DNA 분석을 통한 친자확인을 할수 있는 곳은 모두 10여곳. 서울대와 고려대를 비롯해 법의학연구실이 설치된 몇몇 종합병원에서 가능하며 지난해부터 전문 유전자분석 업체들도 여러군데 설립됐다.
이정빈 교수가 최근 3∼4년간 의뢰받은 유전자감식 건수는 연간 200여건. 경제불황기였던 97∼98년 증가세가 다소 주춤하긴 했지만 최근 급격하게 늘고 있는 추세다.
흥미로운 것은 조사를 의뢰하는 사람의 80%는 20대와 30대 기혼남성들이라는 것. 40대 이상 연령대에서는 이런 문제로 검사하는 일이 거의 없다. 조사의 증가가 급격히 개방된 성문화와 관련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전체 조사 의뢰자들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미만. 여성 조사 의뢰자는 아예 없는 것이 정상일 것 같지만 남편의 의처증을 견디다 못해 "아이의 친부를 밝혀 결백을 증명해 달라"고 의뢰해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전문 조사기관 (주)아이덴티진의 윤요셉 이사는 "조사 의뢰자 수는 밝힐수 없지만 매달 증가하는 추세다. 의뢰자의 60%가 다른 기관에서 조사 결과를 통보받고도 재차 확인을 위해 온 사람들"이라며 한번 떠오른 의심이 얼마나 해소하기 힘든지를 보여줬다.
■아무것도 감출수 없다.
유전자감식방법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도입됐던 것은 지난 1985년. 영국 레스터대학의 알렉 제프리스 교수가 강간 피해여성의 질 내에서 가해남성의 정액을 채취해 용의자와 동일인임을 가려낸 경우였다.
이렇게 시작한 감식방법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했다. 모니카 르윈스키의 `파란 드레스'에 묻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정액이 몇년 뒤에도 온전한 증거가 된 것은 유명한 얘기.
취재팀은 사건 현장의 증거 분석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찾았다. 국과수 유전자분석팀이 주력하는 분야는 변사사고때의 신원 확인.
사체에서 검출된 DNA는 직계 존비속(부모, 형제, 자녀)의 DNA와 비교를 통해 신원을 밝혀내는 기능을 발휘한다.
DNA는 변사 사건의 경우 용의자가 현장에 있었는지에 대해 움직일수 없는 증거로 쓰인다. 법정에서 증거로 쓰일만한 양의 DNA는 머리카락 1개, 침을 바른 우표, 봉투의 접는 부분, 담배 꽁초, 씹던 껌에서도 추출할수 있다.
산 사람의 혈액이 샘플로 제공된다면 결과는 2,3일이면 알수 있지만 오래된 유골에서 DNA를 검출해야 하는 경우에는 1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걸릴 뿐 결과는 분명히 나온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면수 유전자분석실장은 시간에 의한 파손 때문에 DNA를 채취할수 없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고 단언한다. 1500년전의 시체에서도 DNA를 뽑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96년 발굴된 나주 복암리 한 분묘에서는 인골 두 구가 발견됐다. 추정 연대는 6세기. 이들이 남긴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분석한 결과 옹관 안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체는 각각 남자와 여자이며 같은 모계 염색체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어쨌든 이 사건은 1500년전의 유골에서도 DNA를 채취할수 있다는 것을 증명, 수십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산야에 방치된 유해를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줬다.
■"결과를 믿을수 없다."
DNA 분석을 통한 친자확인법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것은 소위 `백지연 사건' 이후.
당시 재미교포 언론인 B씨는 PC통신 등을 통해 "백지연의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에 대한 의혹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다"며 "백씨는 빨리 나서 진실을 밝히라"고 주장했다가 백지연의 고소로 입건됐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이의 친자 여부는 B씨에 대한 실형 선고와는 별 상관이 없는 사안. 법리에 따르면 B씨의 주장이 사실이건 아니건, 자신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는 내용'을 유포시킨 것이므로 명예훼손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지연은 이번 사건을 통해 `결백'을 증명하려고 나섰고, 소극적이던 전남편을 증인으로 채택, 법정의 권위를 빌려 마침내 `친자임이 분명하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한때 방송가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도 떠돌던 "아이 아버지는 ***"이라는 루머가 DNA 분석법이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통해 일시에 무너진 것이다.
■DNA 분석, 믿어도 좋은가?
친자확인은 조사 대상인 부모와 자녀등 3인의 DNA를 비교해 이뤄진다. 최근에는 조사기법의 발달로 부모중 친권 확인을 필요로 하는 쪽과 자녀만으로도 비교가 가능해졌지만 정확한 결과를 위해선 3명 모두의 샘플이 필요하다.
최근 민간 조사업체들은 혈액이 아닌 `타액만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소개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침만은 아니다. 면봉에 침을 묻히며 살짝 입 안 벽의 속껍질 세포를 묻히는 것. 채혈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보다 선진적인 방법으로 꼽힌다.
이정빈교수는 "친자가 아닐 경우 100%, 친자일경우에는 99.99%" 결과를 확신할수 있다고 말한다.
이교수는 친자가 아니라는 감정결과가 나올 경우에는 `친자가 아님'이라고 정확히 못을 박고, 친자일 경우에는 `친자일 확률 00%'라는 식으로 감정결과보고서에 서술하게 돼 있다.
취재진은 `친자일 확률이 99.9999999999998%'라고 적힌 보고서를 입수했다. 물론 `친자가 아닐 확률이 5조분의 1'이라고 읽는 것이 더 정확하다.
조사의 이론은 의외로 간단하다. 모든 사람은 같은 유전자형들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각 유전자형의 두가지 수치를 비교해보면 어느쪽이 아버지, 어느쪽이 어머니로부터 온 것인지를 쉽게 알수 있다.
최근 사례중 가장 연구진을 애먹인 것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번갈아 성폭행을 당한 여성 고용인이 낳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냐를 밝히는 사건.
두 `생부 후보'가 부자간인 만큼 DNA 구성이 너무도 흡사해 평소보다 상당히 많은 유전자형을 비교해서야 확인이 가능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중요한 유전자형 3∼4개면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할수 있다"며 "12∼15개의 유전자형을 비교하면 친생자 관계를 잘못 판정할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 밖의 활용
DNA 분석은 친생자 관계와 신원 확인에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홍수나 산사태로 분묘가 뒤엉켜 조상의 유해를 확인해달라며 찾아온 의뢰자들도 만만치 않다.
보험회사로부터의 의뢰건수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유형이 `무면허 운전자'나 `음주운전자'를 가리는 것. 무면허 운전자나 음주운전자의 경우 사고가 났을 때 동승자와 자리를 바꾸거나 운전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때는 운전석에 남겨진 혈흔의 분포를 조사해 운전자를 가린다.
미국의 경우 걸프전 전후 파병되는 전투병력은 반드시 만약의 경우 사체 확인을 비롯한 유전자 샘플을 남겨놓게 됐고, 한국군에서도 평화유지군으로 해외에 파견된 병력의 경우 모두 유전자 샘플을 남겼다.
민간 유전자 분석업체는 때로 남의 불륜 사실을 추적해내는 `심부름센터'와 비슷한 취급을 받을때도 있다. 이때문에 해당 회사들은 유전자분석을 이용한 친자확인 기법이 긍정적인 목적에도 쓰인다는 사실을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홍보하고 있다.
(주)아이덴티진이 탤런트 이태란을 후원자로 해 벌이고 있는 입양아．고아의 친자 찾아주기 캠페인이 대표적인 예. 부모들이 뒤늦게 마음을 고쳐먹고 아이를 찾으려고 해도 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정확한 기억이나 단서가 없어 확인하기가 만만치 않다.
부모와 자녀가 서로 친생자 관계라고 주장하며 재결합을 원하는 경우라면 구태여 확인이 필요 없을 것 같지만 살다보면 어느 한쪽에서든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파국을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아이덴티진의 윤요셉 이사는 "유전자분석 검사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불신의 씨를 없애 주는 것"이라며 "처음에는 눈물을 흘리며 분명히 `내 아들딸'이라고 하지만 뒤늦게 의혹을 갖지 않으려면 미리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게놈 프로젝트
예로 든 부문들은 DNA에 대한 연구 결과 전체를 놓고 보면 빙산의 일각. 2003년으로 예정된 게놈(genome) 프로젝트가 완성될 경우 그 파장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른다.
게놈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의 염색체를 구성하고 있는 DNA의 유전자형이 각각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해석하는 작업이다.
한 사람의 DNA에 등장하는 염기의 개수는 대략 30억개. 이 염기 하나를 해석하는데 평균 1달러 정도의 비용이 소요된다고 설명한다. 30억개를 모두 해석하는데 드는 비용은 에누리없는 30억달러(약 3조3천억원).
현재까지 30억달러의 예산과 10년의 시간, 전 세계의 최고급 연구진이 투입된 게놈 프로젝트는 오는 2003년 완성을 앞두고 있다. 이런 공공 차원의 게놈 프로젝트 연구와는 별도로 각종 민간기업들도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이 게놈프로젝트가 완성되면 각종 병에 걸리기 쉬운 체질과 후손의 지능 등을 거의 완벽하게 예측해내는 것은 물론, 한 인간의 유전정보를 완전히 해석해 이른바 복제 생명체(clon)를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취재후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누구 씨인지 알아보는 방법' 정도로 알려진 DNA 분석법. 친자확인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다는 사실은 문란해진 성문화와 함께 고도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과학의 발전이 가족관계의 한 축에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했다.
더구나 그런 의혹을 갖고 조사기관을 찾는 사람들이 20∼30대라는 것은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의심하게 하기도 한다.
"의혹을 갖고 있다면 반드시 조사를 해 의혹의 씨앗을 몰아내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가장 좋은 것은 스스로 깨끗한 성생활을 유지하는 것"이란 이정빈 교수의 말은 큰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한쪽 면에서 유전자 분석법은 고도의 지능범들과 싸우는 정의의 구현 수단이었다. "소설과 영화를 통해 지문이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부터 범죄 현장에서 지문이 사라졌다. 유전자 분석법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것이 알려지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는 국과수 유전자분석실 한면수실장의 말은 `양날의 칼'인 첨단 과학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SC현장르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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