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작가 이환경씨 인터뷰
기사입력 2000년 04월 13일 13시 45분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가장 좋아하는 방송작가 이환경씨. `용의 눈물'에 이어 `태조 왕건'으로 한국의 중장년층 시청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집념의 작가.
그를 보고 있으면 뭔가 특별한 인생의 의미가 다가온다. 밑바닥에서부터 최고의 방송작가로 우뚝선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은근한 인간의 냄새는 향기가 느껴진다. 오랜 인내 끝에 핀 꽃처럼 환하게 웃는 모습이 좋아보인다.
이씨는 유년시절 가난 때문에 집을 뛰쳐 나와 전국방방곡곡을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아이스케키'도 팔았고 구두닦이도 했다. 중국집과 세차장에서도 일했고 여관조바와 막노동 등 안해본 일이 없다. 그는 자기 집안의 뜰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험하고 큰 마당에서 자란 셈이다.
그러나 그는 바람부는 세상의 벌판에서 현실을 탓하기보다 꿈을 생각했다. 그의 곁에는 항상 문학이라는 희망이 놓여있었다.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는 시구처럼 그의 가난하고 불행한 시절을 지켜준 것은 세상에 부는 바람과 문학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의 밑바닥 인생경험은 희망으로 탄생할 수 있었고 인간의 역사를 다루는 대하드라마를 쓸수 있게 된 배경인지 모른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가 경험한 세상의 편편들은 큰 드라마를 쓰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그는 주말 안방시청자를 사로잡은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날카로운 역사해석과 인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은 `용의 눈물'을 최고의 사극으로 만들어냈다. `승리자의 기록'을 재점검, 패배자의 입장을 반영하면서 역사를 되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지난 3년여 동안의 논문 및 자료 수집, 1년여의 스토리 구성기간을 거쳐 또 한편의 역작을 준비했다. 국내 처음으로 고려사를 집중조명한 KBS대하드라마 `태조왕건'이 그것이다. 250억원이라는 막대한 제작비를 들인 이 드라마는 방영되자 마자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돌개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이씨는 자주적으로 나라를 통일하고 대제국을 건설한 왕건을 비롯한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를 장쾌한 한편의 대서사시로 만들어가고 있다. 또한 방송드라마와 더불어 도서출판 밀알에서 단행본으로 1,2권(총 12권 예정)이 출간됐다.
몹시 부는 바람에 새 꽃잎들이 안쓰러이 흔들리는 봄날. 인간이 아니라 인생,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행간을 날카로운 시각과 문체로 묘파하는 스타 방송작가 이환경씨의 내면속으로 들어가 봤다.
-인천 출신인데 고향에 대한 추억은?
▲소년기 10대 중반까지 인천에서 자랐죠. 눈앞에는 염전이 펼쳐지는 그런 곳이었죠. 소금바다를 보며 자랐습니다. 희망의 바다만은 아니었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있어선…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은?
▲아버님이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후 철도청의 고위직으로 계셨어요. 좌익은 아니었으나 전쟁이 나고 고초를 당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죠. 불행의 시작이었죠.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희망보다 절망이 큰 시절이었죠. 5형제 중 셋째였는데 생활고 때문에 `아이스케키'장사를 하기도 했어요. 그러다 참다 못해 `가출'을 하고 말았죠.
-어떤 일을 했나?
▲구두닦이, 목재소, 세차장, 중국집, 여관 조바 등 안해본 일이 없었어요. 세상의 굳은 일은 거의 다 해본 것 같아요. 그러나 제겐 문학에의 꿈이 있었어요. 견디기 힘든 일들이 수없이 많았어요. 그 고비를 넘기게 해준 것은 바로 문학이었던 같아요.
-그 시절이 작가생활에 미친 영향은?
▲어딜 가더라도 대학노트와 책은 끼고 살았어요. 희망을 놓지않으려고 노력했죠. 그 시절에 읽은 독서량은 그 누구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주로 토속적 내용을 담은 책, 감각보다는 인생의 의미를 표현한 작품들을 좋아했어요. 천승세 선생의 작품을 특히 좋아했죠.
-작가를 꿈꾼 동기는?
▲초등학교 때 시를 썼어요. 선생님이 시를 보고 칭찬을 해 주곤 했는데 희망을 안겨 주었어요. 어렵고 힘들땐 항상 시를 생각했어요. 인천의 시인 박 송 선생께서 문학에 대한 자세와 힘을 많이 실어주셨죠.
-늦깎이로 데뷔했는데?
▲KBS에 워크샵 제도가 있었어요. 참가자 100명 중 10명을 추려 월 30만원의 급료를 주던 시절이었죠. 첫 데뷔작은 백우암씨의 소설 `갯바람'을 각색한 단막극이었어요. 제 작품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을 받았어요. 방송에 강한 매력을 느꼈죠.
-독특한 글쓰기 방법이나 버릇이 있나?
▲노동일을 하면서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방송드라마 교본을 하나 주웠어요. 수없이 정독을 했죠. 글쓰는 테크닉, 형식 등을 거기서 배웠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교나 방법이 아니죠. 양식이 중요해요. 독서도 많이 했고 경험도 풍부했어요. 그만큼 글쓰는데 자신이 있었어요.
-작업은 주로 어디서 어떻게 하나?
▲한주일 내내 작품하고만 씨름해요. 월요일엔 항상 녹화현장으로 가요. 별로 간섭을 안해요. 간혹 작품의 흐름에 대해 의견제시는 합니다. 주로 맡기는 편이지요. 집필은 이틀은 집에 박혀서하고, 나머지 사흘간은 아는 분이 빌려준 경기도 대성리 집필실에서 원고를 씁니다.
-인생에서 가장 쓴맛을 본때는?
▲막노동일을 할때도 비참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작가가 된 후 도태되었을 때 가장 비참했어요. 제 작품이 선택에서 외면당했을 맛보는 좌절감이란 정말 참기 힘들더군요. 데뷔 이후 저도 몇년동안 공백기간이 있었는데 쓰린 날들이었죠.
-좋은 연기자란?
▲작품을 맡기면 혼신을 다하는 연기자, 작품을 위해 자기를 던질 줄 아는 연기자, 마치 무속인이 신기가 올랐을때처럼 정열적인 연기자가 좋아요. `용의 눈물'을 할때 유동근씨가 그런 경우였어요. 시간을 작품에 충분히 투자하고, 촬영할 때 눈빛이 달라지는 등 혼을 바쳐 연기하는 연기자를 보면 가슴 속으로 흥분되죠.
-작가 입장에서 요즘 연기자들을 볼때?@
▲옛날처럼 정열과 멋이 없는 것같아요. 인기를 좀 얻으면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더군요. 너무 현실적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아요. 녹화 끝나고 소주 한잔하면서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세상이 많이 바뀐거죠.
-대하 역사드라마의 매력은?
▲대하드라마는 삶과 역사를 크게 볼 수 있어요. 단막은 인간에 치중해 인간 자체, 본질을 집요하게 추구한다면 대하드라마는 인간이 만든 역사의 행간을 읽는 재미가 크죠. 승리자의 기록인 역사 속의 가식, 거짓, 오도를 바로잡아가는 과정은 너무나 흥미진진합니다. 그게 보람입니다.
-드라마 `태조 왕건'의 초점은?
▲역시 궁예 견훤 왕건이라는 영웅 호걸들의 이야기죠. 이들 3명의 인물형이 펼쳐나가는 장쾌한 대서사시 같은 작품이 바로 `태조 왕건'입니다. 이들의 삶, 사랑, 야망을 통해 고려사를 다시 읽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승리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그 과정을 통해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남기고 싶습니다.
-`태조 왕건'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가?
▲역사는 혼자 만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통치자가 있으면 그 주변 인물인 백성들과 적당한 타협이 필요한 것입니다. 추종자들에게 준 믿음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신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왕건은 타협과 원만주의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제국을 창업하게 된 것입니다.
-방송작가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많은데?
▲요즘 학생들은 화려한 겉만 보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작가는 인생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해요. 작품이란 인생을 담는 그릇인 셈이죠. 사물을 보는 눈과 현실에 대한 생각을 자신의 그릇에 담을 줄 알아야해요. 그 그릇역시 자신이 만들어야 하죠.
-평소 쌓인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술이죠. 술마시는 게 취미에요. 두주불사형입니다. 원고 마감은 못 시키더라도 술은 먹어야 해요(웃음). 낮술은 즐기고 밤술은 마시고, 술에 모든 것이 있고 거기서 모든 것이 나와요. 안영동 KBS부주간과 자주 어울립니다.
-독자와 드라마 시청자에 하고픈 말은?
▲요즘 모든 드라마는 시청률로 그 결과를 말합니다. 그러나 대하 역사드라마는 정도를 걸어야하는 작품이죠. 정확한 표현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묘사 등으로 인해 허구적인 진실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는 없는 것이죠. `태조 왕건'을 봐주시는 많은 시청자들이 자신의 인생과 오늘의 역사를 과거와 대비해 보는 거울같은 작품이길 기대합니다.
◇이환경씨는? 1950년 인천출생. 80년 드라마 작가로 입문했으며 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 부문에 `겨울바람'이 당선, 데뷔했다. 86년 스포츠서울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불멸의 땅'이 당선됐다. 그동안 `훠어이 훠어이' `적색지대' 등 소설집과 `파천무' `용의 눈물'외에 `전설의 고향' `TV 문학관' 등 단막극 150여편을 집필했다. 현재 역작 `태조 왕건'이 KBS 대하역사드라마로 방영 중.
[박용재 문화부장 eastsea＠]